나그네는 간만에 긴 꿈을 꾸었다.
아니, 그건 그가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도무지 길다고는 할 수 없는 길이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저 그 꿈은 나그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꿈이었기에 ‘길다’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사실을 말하자면, 그 꿈은 사실 더없이 덧없고 짧은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희미한 환상에 가까웠다.
“혁아.”
자신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는 햇살처럼 따뜻하다. 나그네, 아니, 왕혁은 제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무거운 눈꺼풀을 열었다.
태양을 등지고 서있어도 선명하게 보이는 그 얼굴에 박힌 한 쌍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흑요석 같고, 바람에 흩날리는 등나무꽃 색의 머리카락은 구름같이 가볍고 부드러워 보인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꿈같이 느껴지는 상대의 모습에 몇 번 정도 눈을 더 깜빡인 왕혁은,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키고 물었다.
“언제 왔어?”
“방금. 공주님이 외출하셔서 같아서 따라왔어.”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그렇게 놀러 다녀도 되는 거냐고, 너.”
“그러는 혁이도 수련은 안 하고 여기서 자고 있었잖아.”
하여간 한 마디도 지는 일이 없다. 생긴 건 불만 불평 하나 못 할 거 같이 순하게 생겨선. 야무지기도 하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상대의 말이 다 맞는 말이기 때문에 대꾸하기도 민망하다. 제 옆에 나란히 앉는 소녀를 조용히 응시하던 그는 도로 드러누워서 제 몸을 감싸는 풀의 감촉을 느꼈다.
“…공주님 옆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응. 너랑 놀고 오겠다고 했어.”
“수련하겠다는 변명도 안 했다는 거냐고.”
“그거야…, 네가 옆길로 센 거 원시천존님도 알고 계시던데?”
“진짜냐….”
돌아가면 또 굉장한 잔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걸 깨달은 왕혁은 인상을 찌푸린 채 한숨 쉬고, 제 근처에 놓여있는 흰 손을 잡았다.
“나도 데려가라, 서곤륜,”
“안 돼. 남자는 기본적으로 못 들어오는 곳이잖아.”
“나 참, 그냥 하는 말이지, 넌 농담도 모르냐.”
“하하….”
천진하게 웃은 소녀는 왕혁의 손을 마주잡고, 그와 마주볼 수 있도록 풀밭에 똑같이 몸을 뉘였다.
잠깐의 침묵. 풀밭과 자신들을 지나가는 바람소리만이 시끄러운 와중.
고민과 무료함이 복잡하게 섞인 표정으로 하늘만 응시하던 왕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담운.”
“응, 혁아.”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데?”
“내가 갔으면 좋겠어?”
‘불편하면 자리를 비켜주겠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 것이라는 걸 분명 알고 있었지만, 왕혁은 어쩐지 잘못이라도 채근당한 사람 마냥 입을 삐죽이고 말았다.
“가라고 한 적은 없어.”
“그럼 여기 있어도 돼?”
“마음대로 해.”
사실은 가지 않아줬으면 하고 바랬다. 어차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담운은 가지 않을 테니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상대가 제 곁에 있기를 바랐다. 곤륜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스승 되는 원시천존뿐인 제게 담운은 유일한 말벗이자 동료였고, 무엇보다도 그는 좀 말괄량이 같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니까. 곁에만 있어도 힘을 얻고, 웃음이 나게 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혁아, 졸려?”
“…….”
“역시 졸리는 거구나? 내가 자장가 불러줄게.”
가만히 눈을 감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자, 옆에서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몇 번 정도 들어보아서 가사와 곡조를 기억하고 있던 왕혁은 상대가 부르는 자장가에 귀를 기울이며, 졸음이 자신의 온 몸에 퍼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제가 자고 일어나도 상대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손을 마주잡은 채. 제 옆에 누워있을 것이다.
‘…그래, 언제까지고 그럴 줄 알았지.’
왕혁은, 아니, 왕천군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고 원래의 모습을 잃게 된다 해도 그는 곁에 있을 것이라고. 제 입으로 직접 가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아니, 설령 그렇게 말한다 해도 이 어리석고 상냥한 여자는 제 옆에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제 예상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려버렸다.
담운은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 곁에 있었지만, 오히려 제가 그를 죽음으로 밀어 넣어 이별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놈의 계획이 뭐라고.’
그렇게 투덜거려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봉신계획을 위해 담운을 사지로 몰아넣을 테니까. 몇 번을,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자신은, 그러기 위해 만들어 진 존재이기에….
“…아.”
그렇게, 찰나의 꿈이 깨어지고 나그네는 현실로 돌아온다.
들판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사람이라곤 오지 않는 숲까지 온 그는, 그리운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제 이마를 짚고선 두 개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그러게 왜 또 쓸데없는 짓을 했나?”
“…시끄러워. 기분 더러우니까 시비 걸지 마라.”
“그냥 만나러 가러 가면 될 것을, 이게 대체 몇 번 째 인가? 이렇게 보낸 계집애만 8명이야. 고작 천 년 동안 담운을 닮은 계집애를 8명이나 찾은 자네도 대단하군.”
“닥치라고.”
‘하아.’ 한숨을 쉰 것은 충고하던 쪽의 목소리였다.
태공망, 아니, 나그네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 쉬더니 나무에 지친 몸을 기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