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어, 선대님. 투구 벗으셨네요?”

 

라고, 오래간만에 신전에 들른 그의 후임이 이야기했다.

 

“......그래, 이상한가?”

“아뇨, 신기해서 여쭤봤어요. 늘 쓰고 계셨던 거니까......”

“......”

 

선대의 수호자는 늘어진 제 옆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만지작거린다’ 라고는 하더라도 실제로 잡히는 감각은 것은 없다. 어디까지나 생명체를 모사한 흉내일 뿐이다. 손발의 움직임도, 흔들리는 머리카락도, 입고 벗을 수 있는 투구의 흔적조차도 홀로그램 같은 유사품으로 공들여 새겨놓은 것.

어째서 그는 이토록이나, ‘현실감 넘치는’ 존재로 살아 있는 것인가.

단 한 번도 그것에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아니, 없‘었’다. 그가 살아 있는 것 같아 보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런 것 따위는 단 한 순간도 중요치 않았다. 수호자의 사명은 오로지 수호를 이어가는 것 뿐, 이제 ‘선대’ 라는 이름으로만 남은 그가 해야 할 일은 후임의 수호가 완벽하기만을 기도하는 것 뿐.

더는 수호자가 아니게 된 수호자는 명칭을 잃는다. 진즉에 잃어버린 이름은 다시 되찾을 수조차 없었다. 그것은 단지, 그의 일생에 그 어떠한 의미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던 것이다.

 

살아있다는 건, 뭐라고 생각해요?

 

그 물음에 그는 대답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살아간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운명을 이어가는 것......

그 중에 무엇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는 살아있지 않았다.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숨이 막히지도, 가슴이 아리지도......

않았을 터다.

 

그 검은 눈동자.

그렇게나 맑은데도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끝없는 암흑과도 같은 눈. 아름다운 햇살이 들이치는 창 아래 물리적인 형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

장미 덩굴처럼 화려하고 아찔한 향기 속에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입술의 끝을 당겨 웃을 뿐이었다.

결론을 내려주지 않았던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온 모험가라고 했다. 너무나도 검고 이질적인 눈과 머리칼은 그래서였을까. 몇 번이고 게이트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토록 이질감 있는 것은 그녀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계에서의 위협이나 탁한 악을 떠올리기에 그 여자는 너무 천진난만했던 것이다.

그녀가 쓸모없는 수호자의 유령에게 매일같이 말을 걸어 얻어가는 정보는, 그가 녹색 장신구를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새콤한 것이 좋은지 달콤한 것이 좋은지, 길고 굽슬굽슬한 장미꽃 같은 그 검은 머리카락을 묶는 것이 예뻐 보이는지 풀어헤치는 것이 예뻐 보이는지. 꽃은 좋아하는지, 비가 오는 날은 싫어하는지, 새로 산 귀여운 구두과 옷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보이는지, 내일은 날씨가 어땠으면 좋겠는지.

그런 것, 뿐이었으니까......

너무나도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 답을 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생명을 유지하고 일상을 구가하는 것에는 하등 쓸모가 없는, 오로지 개인의 호와 오만을 가르는 이야기......

그런 것을 묻더라도 곤란할 뿐이다. 묻는 말에도 대답이 쉬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런 선호도 따위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가 대답하지 못하면 그냥 웃어 버리고,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저는 말이죠, 녹색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난색이라면 빨강, 한색이라면 파랑이 좋단 말이에요. 이도 저도 아니면, 차라리 노란색이 좋아요. 애매하단 말이죠, 녹색.

그렇지만 말이죠, 장신구는 대개 보석으로 만들잖아요? 투명한 옥이나, 달빛이 섞인 에메랄드 같은 거. 저, 그런 것들의 투명한 반짝거림을 좋아해요. 그래서 녹색도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녹색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라, 그런가?

...흐헹. 하긴, 전 아직도 다른 색이 더 좋아요. 그렇지, 기사님은 좋아하는 색 없으세요? 왜, 있으면 입게 되는 색이라든지.

 

......특별히 좋아하는 색은 없습니다. 입는, 색은......

검은색... 붉은색?

 

저기... 그거 이유는 안 물어볼게요......

 

그런 이야기들을 몇 번이고, 며칠이고 지속했다.

가치가 없는 선대의 유령은 그녀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알았다. 귀여운 레이스가 달린 옷을 좋아한다는 것도, 초콜릿 아이스크림보다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것도, 달콤한 건 좋아하지만 쓴 것은 입에도 안 댄다는 것도.

내일의 날씨는 맑을 예정이며, 오늘의 날씨는 비가 온다고 했지만 구름만 잔뜩 끼어 있었고, 어제는 잠시 소나기가 왔다는 것도.

판테온에는 화단이 많지 않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니 길거리에 조그마한 들꽃 따위가 예쁜 색으로 피어 있었다는 것도.

민들레 몇 송이를 한아름 엮은 조그마한 잡초 꽃다발을 그는 잡아 볼 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을 구석진 곳에 몰래 숨겨놓고는 신관들에게는 비밀이라고 키득키득 웃었다.

굳이 그런 식으로 비밀을 요구하지 않아도, 그는 그 누구에게도 그녀가 꽃송이를 숨겨놓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을 터인데.

가늘고 흰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갖다대고 쉿, 하면서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다발을 숨겨 둔 구석을 한참간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꽃은 쉬이 시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또 다음 날도 찾아왔다.

 

살아있다는 건, 뭐라고 생각해요?

 

그는 대답할 수 없다. 살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있지 않은 생물이라면, 어째서 온종일 그 시든 꽃을 들여다보는가.

색이 죽고 갈색이 되어가는 민들레를, 그는 그녀가 떠나가고 혼자 남았을 때마다 쳐다보았다.

이 신전 안이 이토록 적막했던가? 나는 원래도 이렇게나 동떨어진 존재였던가?

어디에 무엇을 말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그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 쳐다봐주지 않는 것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이런 기분이었던가?

어째서 그런 것들로 마음이 흔들리는 걸까. 어째서 막막함은 차오르고, 물을 머금은 것 같은 갑갑함은 가슴 언저리에 남아 있는 걸까.

 

오늘 날씨가 엄청 좋아요. 하늘은 새파랗고 공기는 살랑살랑해서, 꼭 강아지가 뺨을 핥는 것 같았다니까요.

 

그녀는 함께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새처럼 날아와 그의 발밑에 씨앗을 한두 개 뿌려놓고는, 그것이 어디에서 자랐고 얼마나 예쁜 꽃을 피우는 종류인지에 대해 낱낱이 지저귀고는 했다.

 

...그런 공기는 분명 기분이 좋겠군요.

 

그런 당신과 날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행복한 것일지에 대해 감히 상상하고 마는 것은, 저주받은 망령처럼 신전 내부에 붙잡혀 영원히 감금당한 그의 몫이었다.

그녀가 말한 바람을 맞고 싶었다.

단지 이 갑갑한 신전에서 빠져나가, 폐부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흔들리는 바람을 느끼며,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모든 욕망을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생전 단 한 번도 들꽃을 아름다워한 적 없었고, 달콤한 간식의 바삭한 표면을 그리워한 적도 없었고, 몇 번 입지도 않을 옷을 사러 몇 시간씩 나가 거울 앞에서 빙빙 돌아 본 적도 없었으며, 누군가와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걸어다니며,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그리워져 견딜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을 의미 없다 치부하고 잃어버린, 아주 오랜 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아아, 나는 어째서 그 수많은 것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사랑했지만, 의무를 우선했던 것 뿐이다.

눈을 감는 그 순간에마저 그는 수호자였다. 감히 수호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생은 너무나도 삭막하며 적막하고, 돌아보면 그 어디에도 검게 말라빠진 핏자국뿐이었기에, 그리워진 지금에서야 매달려 보아도 추억할 것 하나 없었을 뿐이다.

 

저기, 살아있다는 건 뭐라고 생각해요.

 

살아있다는 것은 존재하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리워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살아있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아니다, 전부 틀렸다.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은......

 

기사님은 말이죠, 투구를 벗으면 멋질 것 같아요.

왜냐면 그 투구, 얼굴을 너무 가리고 있단 말이에요.

이렇게 밑에서 올려다보면 기사님이 보인다구요.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가리는 게 독이 된다는 거 아세요?

그 투구보다 더 화려하게 생겼어요, 정말인데.

얼굴 잘 보고 싶단 말이에요, 투구 벗으면 기사님 얼굴 보러 매일매일 올 텐데.

네? 이미 매일매일 오고 있지 않냐구요?

아이 참, 당연히 더 매일매일 오겠다는 뜻이죠!

매일매일이 어떻게 더 오냐구요?

그러게......

영혼 결혼식이라도 할까? 아하항, 농담이에요~

그게, 나는 기사님을 좋아하지만, 기사님은 나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테니까?

나를 좋아해요?

정말요?

아하하.

 

아, 살아있다는 것은.

싹을 틔울 수 있다는 뜻이다.

길거리를 떠돌다 담벼락에 나앉은 씨앗도, 발치에 구르고 치여 돌들 사이 파묻힌 씨앗도, 몇 백 년 전의, 말라붙고 병들어 생명력을 숨긴 씨앗도......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것이다.

 

숨겨놓았던 풀꽃은 이제 말라, 건드리면 바삭바삭하게 부서져 내리겠지만...

 

“......나는 이제, 노바를 수호하는 몸이 아니니까.”

 

수호자였던 것은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아득하게 중얼거렸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