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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건, 뭐라고 생각해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게 된 순간 그는 패배한 것이다.

르네는 연약한 덫 속에 감긴 투명한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남의 사랑은 정말로 재미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만들어서 노는 것 아니겠어.

 

 

그러니까 내가 그걸 깨달은 건 고작 몇 주 전의 일인데, 판테온 신전의 기둥 뒤에 비치곤 하는 희끗하고 푸른 형상이 무언가의 원령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그 이상의 관심은 두지 않았기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누구인지는 몰랐던 거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건장하고 단단한 골격이 지나치게 살아있는 것다워서 그게 유령인 줄도 한참을 뒤에 깨달았을 정도다. 나는 차원 사이를 잇는 게이트라든가 뭔가 하는 성가신 것을 잘 사용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를 스쳐간 일도 한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래서 또 매그너스 님이 한참, 나는 그 녀석이 싫다고 중얼거리던 말에도 신전을 수호신처럼 지키고 선 그것과는 곧바로 연결지을 수 없었다는 일이다.

내가 둔한 게 아니라니까. 아무튼.

애초에 내가 얼굴 얘기를 들은 것도 아니고 가뜩이나 투구를 이마까지 눌러써서 얼굴도 안 보이는 유령이 누구인지 무슨 수로 알아 내가 무슨 초능력자인 줄 알아? 어쨌거나 그랬다. 그게 누구인지 깨달은 건 얼마 전에 수호자인가 뭔가 하는 애기 노바를 몰래 뒤따라다니다가 알았다. 근데 이건 스토킹이 아니라 정탐! 작전 어쩌구! 애기 노바래도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덩치도 크고, 싹수가 파래가지고 쑥쑥 클 것 같던데 매그너스 님은 아니 침대에서는 다른 남자 얘기 좀 안 하면 안 되냐? 하면서 이야기를 자꾸 안 들으려고 하니까 내가 대신 탐색해주는 것 뿐이다. 겸사겸사 현혹도 좀 시키고 미래도 좀 흐려 놓고 어째 꼬셔도 넘어 올 만한 녀석이 아니라서 빈틈만 지켜보고 있기는 했는데...

그러다가 발견한 거다. 어쩜 세상에 이렇게 고고하고 위태로운 존재가 다 있는지.

 

그래서 노바족은 태초부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수호자 직이라는 게 있는데 이게 대충 환생제인 모양으로, 뭐 영혼에 낙인이라도 찍어 뒀는지 수호자가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일정 기간 후에 다시 카이저가 되고 어쩌구저쩌구... 그래서 나는 단순히 환생제인 줄만 알았는데 이 환생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선대의 영혼이 잔류사념처럼 남아 있더란 말이야. 대충 의지라고 부르는데 그게 어떻게 의지니, 존재 하나가 통으로 유령처럼 남아 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그건 덜 세탁된 거다. 환생이라고 부르려면 가지고 있는 영혼의 핵에 전생의 것들이 기억처럼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이건 뭐 영혼 중심만 빼서 재활용하고 겉부분에 남아 있던 전생의 것들은 단순히 옆에 늘어놓은 셈이니까, 전생의 인물과 현생의 인물이 동일인물이 아니게 된다, 대충 그 모양이지. 그건 그냥 이를테면 하나의 기억 저장소 중심부 같은 게 된다고. 수호자들 머리 괜찮은 거야?

안 괜찮아 보였다. 그 잔류사념을 의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비밀이 엄수된 적막한 구역에서 하루 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서 있는 삶이라니, 차라리 무슨 말하는 석상이 상태가 나아 보일 정도였다. 근데 비밀 엄수 구역에 내가 어떻게 들어갔냐고? 그건 다 방법이 있지♡ 아무튼 사실 죽었으니까 삶이라고 하기에는 뭐한데 나는 살아있다 안 살아있다 그런 거를 자아의 존재로 센단 말이지. 육체라는 건 뭐 나도 만들 수 있다. 근데 육체라는 건 그냥 좋은 말로 육체지 피와 살로 만든 안드로이드 같은 거라서 결론적으로 자아라는 게 없으면 그게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까... 굳이 몸 만드는 능력 같은 거 없어도 자아 있으면 뭐 썩어가는 시체에라도 깃들면 되잖아? 역시 자아가 삶의 한 단위라니까.

아무튼 보통 안 괜찮아 보인다는 거는 원론적으로 정신상태가 좀 나쁘다는 거고 그럼 보통 내가 삶아먹기 대박 쉬웠다. 그럼 저거부터 먹어야겠다. 나는 뭐부터 할까 고민하다 일단 펜릴에게 신전 금지구역 출입 허가증을 받으러 갔다. 펜릴은 날 볼 때마다 한 삼십년쯤 늙은 얼굴을 하는데 진짜 웃긴다. 거기서 더 늙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르는데.

판테온 측 간부인 펜릴이랑 적인 내가 무슨 내통을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전혀 아니다, 펜릴은 음 그냥, 신탁? 그런 거를 처리하는 거니까. 뭐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데 그러면 당연히 내 말도 들어 주겠지. 그렇다고 내가 신이라는 거는 아니고, 신이라는 거는 결국 운명에 손대고 세계를 뒤죽박죽 헤집어 놓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결국 그렇게 된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녀석이니까, 그러니까 그거다. 대충 악신을 잠재우기 위해 산 제물을 바치는 어쩌구저쩌구... 근데 나는 악신도 아니고 산 제물도 필요 없고, 기껏해야 내가 요구하는 건 무슨 신관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든가 신전 출입권을 달라든가 하는 거고. 그거 거절해도 난 내가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쪼끔 삐지니까 고대의 용한테 신벌을 내려주세요 하고 말할지도 모르고, 인간들은ㅡ아니 얘네는 노바지만ㅡ웃긴 게 신이 자기들 편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뭐 운명에 크게 문제 있는 것도 아니면 주위사람 부탁 정도는 들어주지 보통... 물론 그래도 안 들어주는 신들도 있는데 다들 걍 살다보니 신 된 거라 아무튼간에... 너무 윗세계 이야기를 했는데 나도 나름 평범하게 살면서는 그런 일 안 하는데 신관이 내 말 안 들어주면 대박 삐진단 말이야? 다른 애들은 그럴 수 있는데, 신관이 그러며는, 신관이 그러며는 그 뭐냐, 직무유기지.

신관도 결국 노바의 신관이니까 노바 편을 드느냐 신 편을 드느냐 대충 이런 길인데 펜릴은 나이 먹은 만큼 신실하고 신심이 깊어가지고, 얼마나 자기 안목에의 자신감이 넘치냐며는 그냥 상대방 슥 보고도 이 사람이 선한가 안 선한가 판단해가지고 게이트 통과 허가증도 내어준다니까는. 뭐 펜릴도 나이 헛으로 먹은 거는 아니니까는 대충 자기 판단에의 뭐시기가 있겠지만... 그러니까 대충 나도 그런 거다. 나는 펜릴이 내 준 뭔가들로 판테온을 침략하지는 않으니까. 그냥 뭇 노바들의 마음을 침략한달까... 저번에 신관인 척 했을 때는 판테온 인구의 절반을 꼬셔버렸는데 그거 되게 재밌었고 애들이 나인 줄도 몰라서 엄청 웃겼다. 신관으로서의 나는 뭐 먼 곳으로 무사 수행 비슷한 거 떠난 척 했다.

뭐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아무튼 그래서 허가증 받고 나는 모험가인 척을 했다. 펜릴한테 머리 묶은 게 귀엽냐 안 묶은 게 귀엽냐 했더니 펜릴이 창틀 위를 기어가는 거미를 본 것처럼 그냥 간절하게 기도해서 재미없어서 그냥 나왔다. 왜 그렇게 내가 빨리 받을 거 받고 꺼지길 바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닌데 저번에 클리앙은 나 좋다고 싱글벙글 같이 수다도 떨어주고 그랬는데 아무튼 늙은이가 꼬장꼬장해가지구서. 노바족들 보수적이어가지고 늙어먹을수록 애들이 사방으로 꽉 막혔단 말이야. 꼭 그런 것도 아닌게 사실 유렌스 그 영감탱이는 오히려 너무 늙어가지고 한 바탕 돌았는지 성질이 드럽게 파란만장해가지구는 펜릴보다 나이도 많음서 무슨 두 배는 더 살 것처럼 구는데 여하튼... 오래 살아주면 좋지. 장수하는 애들은 까불까불하니 귀엽다.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나는 그래서 귀엽게 머리 올려 묶고 금지구역까지 가서는 다시 풀었다. 묶은 것보다 푼 게 더 섹시하니까... 매그너스 님이 들으면 개 풀 뜯어먹는 소리 듣는 것처럼 굴었겠지만... 손목에 머리끈을 대롱대롱 매단 채 근처를 조금 헤매자 아니나다를까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유령이 보였다.

 

그러면 이제 이 유령이 뭔지 설명을 해 볼까, 대충 깨달았겠지만 이 유령은 선대 카이저ㅡ그러니까 노바족의 수호자라고 부르는ㅡ의 의지, 즉 애기 수호자의 전생의 잔류사념으로, 굳이 따지자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더 따지고 보면 이것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어떤 논의가 필요한 형체로, 뭐 나는 대충 살아있고 존재하니까 꼬실 수도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보기는 하지만 이 노바를 엄청나게 싫어하는 매그너스 님이 본다면 아니 뒤진거지 뭘 논의까지 해서 살려놓으려고 하냐고 역정을 낼 수도 있는 대충 그런 유령이랄까, 그렇다.

 

그는 내가 근처에서 쫄랑거리자 언뜻 나를 바라보았다가 도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봤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 유령은 투구를 무슨 이마까지 눌러썼다니까... 코랑 입밖에 안 보이지만 어쨌든 잘생겼다는 건 확신한다. 안 긁어도 당첨이다. 그래도 역시 긁은 얼굴이 보고 싶으니까 그의 근처에 서서,

 

“저기이.”

 

하고 꼬리를 질질 끈 말을 걸었다.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내가 자신이 아닌 무슨 뒤에 있는 신상이나 기둥에게 말을 걸었다고 생각하고 납득한 모양이었다. 뭐 어떻게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자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후계자 하나뿐인데 애기 수호자가 빨빨대며 온갖 곳을 돌아다니느라 말 안 걸어주고 살아서 죽은 뒤 내내 석상처럼 살아왔다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갔다. 아니 보아한들 석상보다 이야기를 덜 들은 모양인지 아무튼간에...

 

“당신이요, 당신, 유령 기사님.”

“!”

 

거의 몸이 맞닿을 거리까지 다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용의 아귀 같은 투구 안을 올려다보며...

...얼굴이 보였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뒤로 물러났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는 몹시 당황한 투로 몇 번 웅얼거리다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저 말입니까?”

“그럼요.”

 

목소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허망한 것이다. 나는 그 다정한 투와 낮은 음을 똑똑하게 들었지만, 아마도 이것은 평범한 사람은 듣지 못할 계층의 소리다. 보이더라도 만질 수 없는 것과, 만질 수 있더라도 들리지 않는 것과, 들리더라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지만, 뭐 사실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말을 얹을 일도 안 되지만 어찌되었든간 나는 그런 것들을 죄다 할 수 있었는데, 이거는 뭐 그냥... 조절하면 된다.

그냥 된다. 뭐...... 인간들은 안 되겠지만......

 

“...제가 보이십니까?”

“세상에 어쩜 이렇게 유령 같은 발언을! 당연히 보이니까 묻고 있지 않겠어요.”

“어, 어떻게...”

 

어떻게냐고 물어도 나도 잘 모른다...

그냥 된다......

너는 산소 어떻게 헤모글로빈으로 옮기는데? 아니 유령이니까 몸이 없어서 못 옮기고 있겠지마는 아무튼... 뇌도 없는데 어떻게 생각을 하는데? 물어보면 대답 못 할 거 아냐, 나도 못 해!

물론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그러면 안 된다. 나는 이를테면 뭐랄까, 갑자기 날아온 민들레 씨앗 같은 것이어야 하니까. 어딘가 신비스럽고, 사랑스럽고, 이 곳에 뿌리를 내릴 것 같으면서도 갑자기 날아갈 수 있을 듯한.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당황으로 허물어진 입매가 어느샌가 굳어 있었다.

 

“저는 이 곳에 깃든 수호자의 의지입니다. 저의 후계가 아니고서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존재지요. 그런 저를 목도하는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또, 이 곳에 어떻게 들어 온 겁니까?”

 

음 뭐, 사실 그런 부분을 물어보면 딱히 논리적으로 할 말은 없다. 그렇게 안 물어봤어도 논리적으로는 말 못했겠지만... 나는 그냥 머리를 꼬면서 새침하게.

 

“몰라요.”

 

할 뿐이다.

 

“......예?”

“몰라요, 그냥 보였는걸. 하나는 말할 수 있겠네요, 쨔잔, 출입 허가증! 저는 펜릴 님이 직접 금지구역 출입을 허가해 주신 모험가거든요, 그런데 당신 정말 수호자예요? 노바족의 수호기사도 선대가 있었던 건가요?”

“펜릴 님이...”

 

나는 이해 못 하겠지만 노바족들은 은근히 펜릴을 믿는단 말이야. 선대의 단단히 굳은 무표정도 약간 느슨해져 있었다. 무슨 보증 수표라도 되는 모양이지? 나쁜 마음은 말이야, 어디에서나 생겨나는 거라구. 막말로 게이트 통과하고 나서 마음 바꿔먹으면 어떻게 할 건데?

나는 뭐 나한테 푹 빠진 남자 괴롭힐 생각밖에 없긴 하다. 그치만 그것도 나쁜 짓인데. 특히나 이 기사님에게는. 왜냐하면 나는 지금부터 이 기사님을 괴롭힐 생각인걸.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막, 마음을 파고들어서.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다. 나는 매일같이 이 곳에 서서 아무런 소리 없이 버티는 일 같은 거 못 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산담? 아마도 그렇게 살지 않는 법을 모르니까 그러는 것이다. 나는 그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아, 지금부터 많은 행복한 일들을 가르쳐 줘야지. 하루 종일 그와 함께 있으면서 온갖 즐거운 것들과 햇빛의 향기를 모사해 줄 테고, 바깥의 꽃은 어떻고 하늘의 색이 어땠는지를 재잘거려 주며, 하루의 사소한 것들마저도 사랑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어 줄 테다.

 

그러고는.

 

“...예, 그렇다면 말씀드려도 괜찮겠지요. 카이저는 환생하는 존재, 후계가 어느 특정 수준에 다다르면 정수를 물려주고 물러나는 것이 선대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할 일은 전부 끝났습니다만... ......”

“그럼, 지금까지 계속 여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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