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난제를 꺼내 보겠다.
그 손에 죽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여자가, 이 손으로 죽여버릴 정도로 증오하던 남자를, ‘자신을 위해’ 유혹했다는 소리를 들은 남자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은 걸까
일단 매그너스의 답변은 이렇다.
“이 XXX아.”
“에헷.”
“에헷이고 나발이고 입 털 생각 하지 말고 제대로 불어라.”
“데헷.”
“불라고.”
르네가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적대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치만요, 이제 다 끝났고......”
“끝나? 끝난 건 네 목숨이다.”
“꺄♥”
살해 협박을 무슨 고양이 그르렁대는 소리처럼 받아넘긴 르네가 매그너스의 굵은 손을 가볍게 피하며 깃털 같은 솜씨로 그의 책상 위를 사뿐 밟는다. 160cm씩이나 되면서 풀잎 위의 요정처럼 구는 그 양심없는 행보에 으르렁대던 매그너스의 미간이 조금 느슨해졌지만, 그렇다고 분노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귀엽게 굴면 다인 줄 알아!
“너 그거랑 어디까지 했어, 이 새끼야.”
“글쎄 유령이라 몸 없었다니까 그러네......”
발간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민 르네가 기억을 되새기며 살짝 시선을 내리깐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물어봐도 말이지......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 했다?
르네야 유령을 적당히 만질 수는 있지만, 뭐... 딱히 투구 외에는 아무것도 안 벗겼고, 딱히 고백이 오간 것도 아니지, 사랑을 입에 담은 것도 아니지.
정말 아ㅡ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그럼, 정말이지.
그가 르네를 구원으로 여겨도, 저 바깥의 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이자 생의 통로이고, 그의 숨을 붙여 준 불씨이자 희망의 온상지라 생각하더라도......
그게 르네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르네가 샐쭉하게 웃으며, 꽃물 든 듯한 손끝로 제 입술을 가볍게 짓눌렀다.
“그냥 조금 가지고 놀았어요.”
“......하아.”
조그으으음......
르네의 ‘조금’ 이라는 건 믿을 수가 없단 말이다. 매그너스가 뭐 눈치가 나쁜 것도 아니고 이 녀석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니 당연한 소리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매그너스는 르네를 알고 있다.
르네는 매그너스를 사랑한다. 그를 위해서 가볍게 죽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몇 번을 막고 시험해도 변하지 않아, 그가 치우는 것을 포기한 흙발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정원을 만들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매그너스가 홀딱 반하고 말 정도니까 멍청한 다른 노바들의 순정을 녹여먹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대 카이저는 조금 세심하게 공들였던 것 같다만, 결론적으로 저렇게 됐다......
사람의 마음에 봄을 몰고 오는 전술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매그너스도 몇 번 봤는데 그냥... 혀가 내둘러진다. 저 녀석은 거짓말도 덜 한다. 본인의 머리가 복잡해지면 귀찮다는 이유로, 지켜야 하는 커다란 틀만 만든 뒤 그 안쪽은 전부 진실로 채워 넣는다.
그 모든 것이 허상이었음을 알고서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 제일 악질이다. 매그너스가 상대였으면 정신 나갔다.
뭐, 그런데 매그너스가 알 바는 아니다.
매그너스 본인만큼은, 르네의 그 거대한 놀이의 밖에 존재하는, 그야말로 오롯이 하나뿐인 예외였으므로.
...그래, 뭐, 르네에게 홀린 남자들과 별 다를 바 없을 주장이다만, 그는 자신만만해할 이유가 있다. 애시당초 지금도 매그너스에게만 이렇게 쫄랑쫄랑, 비밀 없이 일러바치고 있기도 하고.
또 이 녀석은 재미없고 아픈 일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엄살도 심하고 금세 지루해하고, 아무튼간에 떠받들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 애초에 그러니까 누굴 마구 유혹해서 저에게 푹 빠지게 하는 것이겠다마는......
“야.”
“네~에?”
“내가 그 새끼 싫어하는 거 알지.”
“......알죠?”
“그 녀석은 짜증나니까, 네가 그 녀석을 쳐다본 눈으로 날 쳐다본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네.”
“......어, 그...... ...그치만 딱히 시선에 담는다고 뭐 오염된다거나 하지는 않지 않을까요...? 르네의 눈은 소중하지 않을까요? 르네의 눈은 르네의 눈이지 않을까요?”
“오랜만에 네가 날 제대로 빡치게 했단 말이지......”
“그...... 한 번만 봐 주시면 안 되는 부분일지......”
“안 돼, 눈 떠. 맨 손으로 할 거야.”
“......”
이것 봐.
이런 짓을 하는데도 날 사랑하잖아.
아무리 오만방자하고 가학적이고 폭력성 있게 굴어도, 르네는 절대로 매그너스를 떠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이렇게 할 수 없다.
오로지 매그너스만이, 이런 짓을 하고서도 르네를 여전히 품에 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ㅡ
굳이 말하자면 르네는 민들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딱히 예쁜 꽃은 아니다. 르네가 좋아하는 것은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장미나 그 다발 안에 콕콕 박혀 있곤 한 조그마한 안개꽃 따위다.
그래도 굳이 그 꽃에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면, 일단은 줄기를 꺾으면 흰 액이 흘러나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것을 훅 하고 불어젖히면 날아가는 작은 솜털들의 여행을 꼽을 수 있겠다.
그 뒤는 딱히 르네의 알 바가 아니다.
물 없는 바닥에 나앉은 씨앗이 어떻게 되는지, 줄기 꺾인 꽃이 도로 되살아날 수 있을지. 아니,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꽃씨를 불어젖히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적어도 르네는 그렇지 않다.
그건 그냥 재미있는 오락일 뿐이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불쌍하니까.’
굳이 기회가 된다면, 꽃의 씨앗을 땅이 있는 곳으로 불어 주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알량한 선의,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상냥함. 동정심에서 기인한 어떤 것들......
그걸 르네는 희망고문이라고 부르는데, 하지만, 그런 게 아예 없는 것보다는 역시 더 나은 일이 아니겠는가?
......기사님, 절 의심하세요?
그렇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선대 카이저는ㅡ 그는 이제 노바를 수호하는 몸이 아니다. 육신도 없고 영혼도 다 닳아빠져 어디에도 이야기를 전할 수 없는, 죽어버린 어떤 영혼일 뿐이다.
알고 있음에도, 사람으로서 의구심이 드는 것에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이였으므로.
기사님, 저기, 기사님.
저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사랑스러운 여자, 밝고 활달하고 천진난만한, 달콤한 간식도 예쁜 옷도 좋아하는, 딱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취미를 가진 여자. 웃는 얼굴이 사랑스럽고, 손가락이 아주 가늘고, 뺨은 붉으며 머리카락은 부드러워 보이는......
사는 곳도, 나이도, 이름도, 무엇을 하다 왔는지도, 무엇을 하러 가는지도, 언제 또 오는 건지도,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말해주지 않는, 여자......
그것을 궁금해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알려주지 않은 부분에 의심을 품는 것이 잘못이었을까?
기사님, 저랑 지금까지 계속 같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저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
저, 펜릴 님께 허가증도 받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가까이서 보여달라구요? 아하하......
의문을 증폭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고......
마치 그가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요구를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자신을 믿지 못하겠느냐고 이야기할 뿐이었는데.
......왜 어떤 것도 대답해 주지 않으십니까?
그런 식으로 자꾸만, 이야기를 피하시면, 저는......
의심하고 싶지 않으니 물은 것이 아닌가.
숨기지 않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말해주지 않았다. 그 무엇도 말해주지 않았다.
한 번 의문을 품으면 그 육신의 모든 것이 달리 보인다. 지독하게 이질적인 검은 눈도, 아름답다 생각한 하얀 피부도, 모든 정황과 근거가 전부 난폭한 의심에 쏠려, 그의 성정으로는 도저히 이야기를 묻어둘 수 없게 만든다.
이토록 의심스러운 이를 고스란히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기분을 품고 그녀를 대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단지 그는ㅡ 그 입에서, ‘자신은 나쁜 짓 따위 하지 않는다’ 는 확답만을 얻어내었더라도, 그것을 믿어 버리고 말았을 텐데.
그런 거짓말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녀는 정말로 악인이었던 것이리라.
기사님, 저를 의심하시는 거군요.
꿈결과도 같다. 덧없기 그지없다. 가볍게 건드리면 이미 어디에도 간데없는 조그마한 눈송이처럼,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처럼......
그럼 됐어요.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기사님, 그거 아시나요?
‘사랑은 의심과 함께할 수 없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그 기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옳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로 ‘옳은 일’ 이었던가?
그는 수호자가 아니다, 무엇도 지킬 것이 없다. 제 스스로조차 지키지 못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신전에 영원히 홀로 남은 외로운 영혼뿐이다.
닳아빠진 긍지를 지켜서 도대체 무엇을 할 생각이었단 말인가.
내일은 날씨가 어떨런지, 그 긴 머리카락은 어떻게 묶고 올 것인지, 밖에 핀 잡초는 지금 무슨 색깔을 하고 있을지. 당신은 어떤 얼굴로 웃어 줄 것인지. 선대 수호자의 영혼은 이제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는 끝없는 고요 속에서 되돌아갈 공허만을 사형 선고처럼 기다리며 살아가야만 한다.
......이것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이미 고개를 내민 싹은, 말라 죽으면 더는 희망조차 없다. 아아, 목이 마르다. 어째서 이렇게 목이 마른 걸까.
그는 애시당초 살아있던 것이 아니지 않았던가. 외딴 소라게처럼 투구를 뒤집어쓰고 암흑만을 기다리는 것은 본디부터 그의 의무가 아니었던가...... ......
어째서 저를 되살렸습니까?
어째서 물을 주고 햇볕을 내주었습니까? 왜 제게 땅을 파고들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까? 왜 제가 빛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셨습니까?
왜 제 세계를 망가트리게 해 놓고, 밖으로 꺼내 주지도 않으시는 겁니까.
그도 알고 있다. 영원히 그리 수호자로 남아 있었으면 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예 모든 것을 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 봤자 무엇하랴. 꺾은 이는 책임질 일 없는, 오로지 말라붙은 풀꽃의 줄기만이 영원히 이 침묵 속에 버려져 남아있을 뿐인데.
아아,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는,
그는, 이미 싹을 틔워 버리고 말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