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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색출 작업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의심 가는 사람은 있어도 확실한 물증이 없는 한 고발은 불가능했고, 물증을 잡기에는 용의자가 너무 재빠르고 영악했다.

그야말로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는 학교생활, 아니, 이(異)세계 생활이 아닌가.

 

‘그래도 원래 세계보다는 나을지도….’

 

낙천적이라 할 것도 없지만, 자신은 어떻게든 일을 처리해 내는 재주가 있는 편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은 억지라고 생각해도, ‘이게 안 되면 저걸로 처리하자’ 같은 말은 남발하고 다니는 게 본인이었지.

그래. 자신은 할 수 있다. 만약 안 된다 해도 뭘 어쩔 건가? 학원장이 자신을 죽이기라도 할 거란 말인가? 비장한 얼굴로 교과서를 정리한 아이렌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양 옆자리의 동급생들을 올려다보았다.

 

“아, 졸려. 기절할 뻔 했네, 진짜.”

“아이렌, 우린 먼저 갈게. 오늘 플라밍고 당번이라….”

“응. 두 사람 다 수고해. 내일 보자.”

 

‘두 사람이 같이 당번인 날은 많지 않았는데, 오늘은 별나게도 같이 일하구나.’ 후다닥 교실 밖으로 빠져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아이렌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미 나갈 준비를 마친 그림에게 물었다.

 

“그림은 이대로 기숙사로 갈 거야?”

“흠. 일단은 그렇지. 너는? 또 도서관?”

“응. 오늘 배운 마법해석학, 너무 어려워서 복습 좀 할래. 에이스에게 물어볼까 했는데, 오늘은 바빠 보이고.”

“흠, 그럼 이 몸 먼저 실례하지!”

 

죽어도 같이 공부하자는 소리는 하지 않을 모양이구나. 아이렌은 빈말로도 옆에 있겠단 말없이 달아나는 작은 그림자를 빤히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성적이 떨어져 같이 유급하지 않을까 걱정되긴 해도, 아직 시험 기간도 아닌데 너무 잔소리를 하는 것도 좋진 않겠지. 자신은 감독생이지 선생님이 아니다. 만약 정말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따끔하게 한 소리 하고 도서관에 처박히게 만들 거지만 말이다.

 

‘에휴.’

 

만약 제가 그림처럼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실전 마법도 연습하러 다녔을 텐데. 제게 없는 것을 갈망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역시 아쉬움 정도는 남는 걸 보면 자신은 꽤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선 아이렌은 시간이 아깝다는 듯 성큼성큼 도서관으로 향했지만,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은 복도에서 허무하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잠깐, 감독생!”

“…?”

 

이 학교에서 감독생이라 불리는 것은 자신뿐이다. 처음 듣는 목소리에 경계하는 것도 잠깐일 뿐. 이내 제게 다가온 커다란 그림자로 고개를 돌린 아이렌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우와.’

 

자신을 불러 세운 것은 어른스러운 얼굴을 한 장신의 미남이었다. 조금의 예고도 없이 거리를 좁혀온 상대는, 교복을 보아하건데 옥타비넬 기숙사의 학생인 모양이었다.

얼굴만 보면 절대 폼피오레 학생일 거라 생각했는데, 옥타비넬 소속이구나. 하긴, 생각해 보면 다른 기숙사에도 잘생긴 학생은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이쪽은 유별나게 잘생긴 얼굴이라, 폼피오레라고 착각 한 것뿐이지.

 

“뭐, 뭔가요?”

 

상대가 몇 학년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얼굴이 어른스러우니 선배일 것만 같다. 자연스럽게 존댓말로 대꾸한 아이렌은 슬쩍 눈치를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상대는 자신은 매우 무해하다는 듯 웃으며 두 손을 저었다.

 

“하하, 나 기억 못하는 구나. 섭섭한데.”

“예?”

“전에 미술 수업 때 근처에 앉았는데. 왜, A반이랑 D반 합동수업 했었잖아?”

 

그 합동수업이라면 일주일 전쯤이긴 하지만, 그때는 그림 그리는 것에 집중하느라 D반에 누가 있는지도 제대로 못 봤었다. 그리고 자신 같이 사람 얼굴을 못 외우는 인간은, 스쳐지나가는 것 정도로는 상대를 기억할 수 없었으니 아는 척을 기대하는 건 애초에 무리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 정체 모를 미남이 제 특성을 알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니 원망의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미안, 기억 안 나는데…. 동급생인지도 몰랐어.”

“그래? 뭐, 자주 오해받거든. 어른스럽게 생긴 덕분에.”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웃은 그는, 신사적인 몸짓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멜로드 터빈. 옥타비넬 기숙사 1학년이고, D반이야. 너는 아이렌 맞지? 고물 기숙사 감독생.”

“맞긴 한데…. 나는 왜 부른 거야?”

“아니, 오늘도 도서관에 가나 싶어서. 너 늘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잖아?”

 

이건,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것 아닌가. 아이렌은 태연하게 제 사생활을 읊는 멜로드에게서 위화감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자신이 늘 도서관에 앉아 공부한다는 건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지만, 그게 같은 반도 아닌 모르는 동급생도 알고 있을만한 일일까?

아이렌이 퍼뜩 파고드는 수상함에 입을 다물자, 멜로드는 더욱 뻔뻔하게 살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도서관에서 학생들끼리 싸우다가 책장을 거하게 엎어버려서, 그거 청소하느라 못 들어간데. 말해줘야 할 거 같아서 불렀어.”

“뭐, 진짜?”

“응. 그냥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헛걸음하게 두긴 좀 그래서?”

 

‘난 여자애들에게 친절하거든.’ 제가 잘생긴 것은 아는지 대놓고 눈부신 미소를 지어보인 멜로드는 슬그머니 뒷걸음질로 물러나 서로의 거리를 벌였다.

 

“다음에 만나면 아는 척 해줘. 그럼, 난 갈게? 좋은 하루 보내, 아이렌.”

“아, 어어…. 응.”

 

갑작스러운 등장만큼이나 갑작스러운 퇴장이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멜로드를 멍하니 보고 있던 아이렌은, 역시 이 학원에는 별난 사람들뿐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바깥으로 향했다.

 

‘오늘은 기숙사에서 공부해야겠네.’

 

방에서 공부하면 집중이 잘 안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걸 두고 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터덜터덜 복도를 지나 중원 쪽으로 빠져나온 그는 걸음을 서두르는 대신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일정이 망가져 기분도 잡쳤으니, 산책이라도 하고 돌아가야지,’

 

아이렌은 눈부신 햇빛 아래 빛나는 싱그러운 초목을 구경하며 스스로를 달랬지만, 신은 그런 그에게 소소한 행복 대신 큰 이벤트를 내려주었다.

 

‘어?’

 

나무그늘 아래 누워있는 그림자가 낯선 듯 익숙하다. 마치 전봇대라도 눕혀놓은 것 같은 길쭉한 실루엣에 시선을 빼앗긴 아이렌은 유심히 대상을 관찰하다가, 이내 그것이 안면이 있는 사람임을 눈치 채고 헛숨을 삼켰다.

아아. 플로이드 리치다. 전에 자신을 쫓아왔던, 거의 똑같이 생겼던 쌍둥이 중 ‘귀여운’ 쪽.

안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기회가 오다니. 기회주의자는 아니지만 좋은 건수가 있다면 그냥 지나치진 않는 아이렌은 조용히 발소리를 줄이고 상대에게 다가갔다.

 

“주무시는 건가…?”

 

혹시라도 플로이드가 깰까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슬그머니 주변을 살피고, 여기에 자신들 뿐임을 확인한 후 비어있는 옆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가슴이 아플 정도다. 이 두근거림이 긴장감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아이렌은 호흡까지 조심하며 눈앞의 커다란 선배를 관찰했다.

처음 본 그 날에도 느꼈지만, 정말 크다. 키뿐만이 아니라, 손도 발도 제 자신이 어린아이가 된 착각이 들 정도로 커다랗다. 이렇게 큰 남자가 자신을 쫓아왔었다니. 그 때 아마 에이스와 듀스가 같이 달려주지 않았다면, 분명 잡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분명 오싹해져야 할 터인데, 아이렌은 어쩐지 얼굴에 열기가 올라 제 뺨을 손등으로 훔쳐야 했다.

이런 제 반응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분명 이상하게 여길 테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렌은 정말 진심으로 눈앞의 이 남자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리들이 그렇게 질색하고 경고했어도 소용없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은 플로이드를 더 알고 싶었고,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으니까.

 

“예쁘다….”

 

나무그늘의 틈새로 들어오는 볕에 빛나는 청록색 머리카락도, 돌로 조각해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부지고 선이 굵은 손도,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몸이 늘어져 만드는 곡선도, 전부 무언가의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다. 마치 마음에 드는 미술품 앞에서 어찌 할 줄 모르고 얼쩡거리는 꼬마처럼 기웃거리며 상대를 살펴보던 아이렌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기 위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가….

 

“아.”

 

눈을 번쩍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플로이드를 보고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망했다. 역시 쓰다듬는 건 무리였다. 건드리면 깨는 게 당연할 텐데, 왜 자신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단 말인가! 멍청한 자신에 대한 자책을 할 틈도 없이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선 아이렌은 얼른 고물 기숙사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몸치인 그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플로이드에게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흐억!”

 

그야말로 경이로운 반사 신경이다. 아니, 물론 제가 느린 것도 한 몫 하겠지만 이렇게 빨리 붙잡을 줄이야. 어쩐지 민망해진 그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상대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다행이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몰래 자는 걸 본 죄가 있다 보니 간담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위축되어버린 아이렌은 자신을 잡아당기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끌려갔다.

 

“뭐야?”

“아, 아니. 그….”

 

저 ‘뭐야’는 왜 사람을 빤히 보고 있었느냐, 는 의미일까. 대답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과연 제 대답을 듣고 상대는 뭐라고 반응할까. ‘예뻐서, 잘생겨서, 아름다워서 보고 있었다.’ 그런 대답을 들으면 보통…, 완전 스토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름다움에 목숨 거는 폼피오레 학생들이라면 기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옥타비넬의 학생이 아니던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제가 매우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아이렌이, 새빨개진 얼굴로 다급히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이렌의 사과를 들은 플로이드는 어떠한 대답도 않고,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사과를 받아주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로 지그시 아이렌을 바라보던 그는 제 곁으로 끌려온 아이렌을 힘을 써서 옆자리에 도로 앉혔다.

 

“어디 가?”

“네?”

 

들뜬 목소리로 묻는 얼굴이 너무나도 가깝게 다가와 있다. 아이렌은 아이처럼 신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플로이드가 ‘화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 기숙사로…?”

“오늘은 혼자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흐음.”

 

혼자라서 아쉬운 걸까. 아니면 혼자라서 좋은 걸까. 반응이 이것도 저것도 어중간한 것뿐이라 의중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이렌은 그 미지의 공포 앞에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이 같은 불확실함 아래 숨은 진심을 찾기 위해 제 쪽에서 질문을 던지기까지 했지.

 

“…저, 혹시 제게 뭔가 하실 말이라도…?”

“글쎄.”

 

웅얼거리며 답한 상대의 눈동자가 제 여기저기를 훑어본다. 마치 제가 아까 전 그랬던 것처럼. 면밀하고도 날카로운 눈길로.

 

아. 나를 궁금해 하는 구나. 나만 궁금해 하는 게 아니라, 이 선배도 나를.

 

누군가는 오만이라 말할지 몰라도. 자신은 느낄 수 있다. 이 순수한 관심은 ‘호기심’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신기한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가 두 손으로 겉과 속을 잔뜩 주무르는 것처럼 시선이 닿는 곳은 전부 훑어본 플로이드는, 갑자기 제 머리카락에 시선을 멈추더니 중얼거렸다.

 

“새우….”

“네?”

“음. 작으니까 아기새우. 그래. 그거면 되겠다.”

 

혼자서 무언가를 결론지은 플로이드는 붙잡았던 팔을 놓고 턱을 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팔이 아프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 손길에서 풀려난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었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 안전거리를 만든 아이렌은 이 다음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긴장한 채 침묵을 유지했지만, 돌아온 것은 뜻밖의 작별인사였다.

 

“아기새우야. 다음에 또 보자?”

“…아기새우?”

“응. 아기새우.”

 

‘아.’ 무언가 짚이는 것이 떠오른 아이렌이 작게 탄식했다.

전에 리들을 금붕어라고 부른 것처럼, 자신에게도 무언가 별명을 지어준 것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영광이다. 별명이 붙었다는 건 좋던 싫던, 상대에게 제 존재가 각인되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갑자기 자신을 놓아주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쓸데없이 더 붙어있어도 좋을 건 없지. 상대의 심기를 건들고 싶지 않은 아이렌은 눈인사와 미소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드디어 이야기 해봤다…!’

 

처음에는 도서관에 못 가서 짜증도 났었는데, 설마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날 줄이야. 히죽거리며 고물 기숙사로 뛰어가는 아이렌은 몇 번이고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뺨을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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