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다음에 맛있는 거 쏠게!”
“알았다니까, 더 늦기 전에 얼른 가-.”
방과 후, 에이엔은 몇 번이나 자신에게 미안하다 사과를 하는 친구의 등을 밀어 교실 문 밖으로 밀어냈다. 미안함에 발길이 안 떨어지는지 계속 뒤돌아보는 친구에게 어서가라 엄포를 놓으며 손을 휙휙 흔들자 친구는 에이엔에게 다시 사과의 말을 하고 후다닥 달려갔다.
복도를 힘차게 내달리는 친구의 뒷모습이 사라진 걸 확인한 에이엔은 몸을 돌려 교실로 들어갔다. 일지는 친구가 몇 줄을 적어놓은 상태에다가 에이엔도 친구와 함께 당번이었기에 큰 무리 없이 뒤를 이어 쓰기 시작했다.
““꺄아아아!!!””
별다른 문제없이 일지를 적어나가던 중, 열어 둔 창문 밖에서 들리는 큰소리에 집중이 끊겼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시끄러운 건가 생각하며 에이엔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살피니 축구부가 연습시합을 하고 있는 건지 익숙한 유니폼과 처음 보는 유니폼이 뒤섞여 넓게 퍼져있었다. 상대편으로 보이는 골대 근처에 서너 명 뭉쳐있는 모습에 에이엔은 방금 들린 소리의 정체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골이 들어간 것에 감격한 여학생들의 환호소리였다. 그리고 여학생의 환호성을 일으킨 골의 주인공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동료들에게 헤드락을 당하면서도 기쁜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 학년 선배이자 한때 함께 디지털세계를 모험했던 사람.
“타이치 선배.”
에이엔이 아주 작게 타이치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에 맞춰 축구부 동료들에게 축하를 받던 타이치가 고개를 들었다. 에이엔의 교실은 2층이면서 운동장과 가까운 교실이여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시선이 맞았다. 갑작스런 눈 맞춤에 어깨가 들썩인 에이엔과 달리 에이엔을 발견한 타이치는 반갑게 팔을 흔들었다. 타이치의 행동에 곁에 있던 동료들은 물론이고 상대팀과 타이치를 응원하고 있던 여학생들의 시선도 에이엔을 향하게 되었다. 거리가 있었기에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웅성거림과 수많은 시선이 느껴져 에이엔은 타이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도망치듯 창가에서 벗어났다.
남은 일지를 쓰려고 자리에 앉았지만 환하게 웃어주던 타이치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때문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리고 볼은 붉어져 에이엔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
졸업식 고백 이후 시간은 새 학기를 향해 흘렀고 에이엔은 6학년이 되었다. 축구부 동아리가 시간하기 전 고문선생이 에이엔만 따로 불러냈다. 그는 에이엔에게 축구부 대신 다른 동아리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해왔다. 중학입시를 위해 6학년은 여름까지 밖에 못한다는 규정도 있었고, 남·여의 체격과 힘 차이로 인한 부상이 걱정 된다는 이유였다. 선생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고 에이엔 스스로도 남학생들과 함께 플레이하는 것이 힘에 부쳐왔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축구부를 그만두니 에이엔과 타이치가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더 없어졌다. 타이치가 졸업하기 전에도 학년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방과 후 동아리 때가 대다수였기에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렇게 엇갈리듯 못 만나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8월 1일이었다. 모험의 시작일. 에이엔은 히카리와 마찬가지로 베놈묘티스몬 사건 이후 모험을 떠났던 거라 다른 사람들과의 모험의 시작일은 달랐지만 괜찮다는 모두의 말에 함께 하기도 했다.
에이엔은 코시로와 함께 약속시간보다 일찍 집합장소인 후지TV에 도착했다. 열댓 명이라는 많은 인원이라 모두가 모일 때까진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아, 미안미안~ 조금 늦었지.”
“타이치, 약속시간이 벌써 30분이나 지났어!”
“미안해요, 오빠가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서 늦었어요.”
“죠 오빠, 대충 예상하고 있었잖아.”
“마자 타이치라면 늘 그렇지.”
“야마토 너 그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지.”
먼저 모여 서로를 안부를 주고받고 있던 무렵, 약속시간에 늦어 미안함이 가득한 히카리와 늦은 것에 대해서 신경 안 쓰는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 타이치가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이미 오기 전부터 늦잠자서 늦는 거라며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이었기에 죠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그의 지각을 놀리기 바빴다.
“오, 에이엔. 오랜만에 본 기분이다. 잘 지냈지?”
“네, 물론이죠.”
야마토와 약간의 말다툼을 하던 타이치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에이엔을 발견하고 반가움에 야마토를 버리고 아이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왔다.
‘선배에게 그날의 고백은 없던 게 되었나보네.’
에이엔 본인도 은연중 없던 일로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럼에도 막상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대하는 타이치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 에이엔은 몰래 가슴께 옷을 쥐었다.
*
일지를 마무리 하고 교실 창문과 문까지 모두 잠근 뒤, 교무실에 열쇠와 일지를 반납한 에이엔은 신발장을 빠져나왔다. 오랜 시간 생각에 빠져 있던 터라 연습시합도 끝났는지 운동장은 텅 비어져 있었다.
“에이엔!”
“타이치 선배.”
휑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빠져 나가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에이엔의 걸음이 멈췄다. 귓가에 닿는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리니 예상했던 사람이 에이엔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멈춰서 기다려주는 에이엔 곁에 선 타이치는 한숨을 고르고 대충 들고 온 스포츠 가방을 고쳐 멨다.
“지금 가는 거야?”
“네, 당번이어서요.”
“그래서 아까 교실에 있었구나.”
타이치는 수고했다며 에이엔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타이치의 손길에 순간 멍하게 있다 금세 정신 차린 에이엔은 당번일 가지고 이렇게 칭찬하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바래다준다는 말과 함께 한보 먼저 걸어가기 시작한 타이치의 뒤를 따라 에이엔도 걸음을 옮겼다. 무슨 말을 건네야 될지 몰라 슬쩍 눈치만 보며 조용히 걸어가던 중 타이치가 먼저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치어리딩부에 들어갔다며?”
“초등학생 때처럼 남·여가 섞여서 축구 할 수 없으니까요.”
“그건 그러네. 그래도 아쉽네, 나 에이엔의 플레이 좋아했으니까.”
시선을 발끝으로 내리고 약간 자조하듯 대답한 에이엔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답하는 타이치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걷고 있던 타이치가 어느새 고개만 살짝 돌려 에이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이치의 부드러운 시선과 함께 그의 말이 다시 들리는 것 같아 얼굴에 열이 모이는 기분이었다.
“그런 말해도 나오는 거 없어요!”
“앗, 같이 가!.”
화끈거리고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고 에이엔은 빠른 걸음으로 한 보 뒤에서 걷고 있던 거리를 좁히다 못해 타이치를 앞질렀다. 제자리에 서 있었던 타이치는 푸핫- 웃음을 터트리고 앞지른 에이엔의 뒤를 쫒았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선배도 조심해서 가세요.”
같은 단지이긴 하지만 에이엔의 집이 있는 동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타이치의 상냥함이 고마웠고 특별취급을 받은 거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집에 들어가는 게 아쉬워 에이엔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돌아가는 타이치를 바라보았다.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초등학생 때보다 훨씬 더 듬직해져 있었다. 노을의 다홍색에 물드는 타이치가 아까 웃고 떠들었던 때와 다르게 멀게 느껴져 에이엔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연하지만 열심히 뻗은 손은 닿지 않았고 손가락 틈 사이로 점점 작아지는 등을 보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