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까지 에이엔을 데려다 준 타이치는 조심히 돌아가라는 그녀의 말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간이라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익숙한 길은 얼마전만해도 분홍빛이 가득했었는데 어느새 싱그러운 녹색으로 바뀌어 있어서 타이치는 저도 모르게 오랜만에 걷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치형?”
“어, 코시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타이치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맞은편에서 코시로가 걸어오고 있었다. 타이치 근처까지 걸어온 코시로는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며 물었고 타이치는 에이엔을 데려다주고 집에 가는 길이라고 답했다.
“코시로, 너는 심부름?”
“네.”
타이치가 코시로 손에 들린 슈퍼봉투로 어디를 다녀왔는지 유추해 물어보니 코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효자네~ 한 손은 입을 가리고 다른 손으론 손사래 치며 놀리자 코시로는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나도 재미없어요. 코시로의 입에서 나온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타이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넌, 참 재미가 없어~.”
“그런 장난에 재미있길 바라면 안 되죠.”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아 툴툴거리는 타이치를 이런 장난이 뭐가 재미있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코시로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자신과 에이엔, 마리 셋이 들어가 있는 단체라인에 ‘타이치 선배가 집까지 데려다 줬어!’ 아기자기한 이모티콘과 함께한 내용이 적힌 라인을 확인한 코시로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 타이치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저 타이치형은 에이엔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에이엔? 물론 소중한 동료지?”
“…타이치형, 형에게 에이엔이 그저 동료라면 제발 그녀에게 더 이상 여지를 주지 마세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자신의 말을 마친 코시로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나듯 빠른 걸음으로 타이치를 스쳐 지나갔다. 영문 모를 말만 하고 갈 길 가는 코시로에 당황한 타이치가 무슨 소리냐고 묻기 위해 그를 불렀을 땐 코시로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저 녀석 갑자기 왜 저래?”
방금 전과 다른 분위기와 말투는 물론이고 그가 했던 말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가지고 일부로 따라가 묻기도 애매했기에 타이치는 제 뒷머리를 몇 번 헤집고 몸을 돌려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엄마도 방금 와서 저녁은 좀 늦을 거야.”
“알았어요.”
집으로 돌아온 타이치는 저녁이 늦을 거란 엄마의 말에 대답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깨에 메고 있던 운동가방을 대충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타이치의 머릿속에 아까 코시로의 말이 맴돌았다.
“여지라니 대체 무…설마?”
코시로가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던 타이치는 한 가지 잊고 있던 일을 떠올렸다.
***
예전에는 하루하루가 길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디지털 세계에서의 여행이 한낮의 꿈으로 느껴질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봄을 알리는 녹색과 분홍색이 한데 어울리는 날 초등학생의 끝을 알리는 졸업식이 열렸다. 작년에는 최연장자인 죠가 졸업했고 올해는 타이치와 야마토, 소라, 마리의 차례였다. 사방에서 축하의 말은 기본이었고 종종 졸업의 아쉬움에 대한 울음소리도 들렸다. 같은 학년 친구들은 물론이고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졸업축하를 받은 타이치는 마지막 추억을 남기자며 사진을 찍었다.
“그럼, 중학교 입학식에서 보자!”
“그래, 입학식에서 보자!”
부모님과 함께 집에 돌아간다며 하나둘 떠나는 친구들과 헤어진 뒤, 타이치 역시 가족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이동하려다가 자신의 옷깃을 잡는 손에 걸음을 멈췄다.
“에이엔?”
“저…선배,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우물쭈물 물어보는 작은 목소리에 타이치는 고개를 들어 학교 벽에 달린 시계를 확인했다. 가족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넉넉한 것을 확인한 타이치는 고개를 끄덕였고 자리를 옮기자는 에이엔의 말에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선배, 좋아해요!”
졸업축하를 해줄 거라 생각했던 타이치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이 에이엔의 입에서 나와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타이치에게 있어서 에이엔은 같은 학교 축구부 후배이면서 함께 디지털세계를 함께 한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각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기에 타이치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한가지였다.
“그…미안해.”
타이치는 자신의 대답을 들은 에이엔의 눈가에 맺혀가는 눈물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에이엔, 나는….”
“괜찮아요!…그러고 보니 선배 졸업식 끝나고 가족들끼리 외식 있다고 하셨죠,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고 있었네요! 미안해요, 먼저 실례할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거리는 걸 알아챘는지 에이엔은 타이치의 말을 끊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 에이엔은 한 발, 두 발 뒷걸음질 치다가 도망치듯 몸을 돌려 달려갔다. 달려가는 에이엔의 이름을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걸음이 멈추는 일 또한 없었다. 타이치는 그저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코시로가 말한 말과 맞아떨어지는 경우를 여러 가지 떠올려봤고 그 중에는 졸업식 날 에이엔에게 받았던 고백도 있었다. 머리 한 쪽에서 이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오답이라고도 생각했다. 왜냐면 그녀가 타이치를 대하는 모습은 예전과 변함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일에 고민하다 보니 코시로의 의미심장한 말을 듣고 며칠이 지나 있었다. 열심히 고민한 것에 비해 나오지 않는 답에 타이치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고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부실 문을 열었다.
“야가미~”
“주장?”
이미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상태임에도 남아있는 주장에 뭐지 생각하면서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손을 설렁설렁 흔드는 주장의 모습에 귀찮은 일을 시킬 거 같은 느낌이 들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유니폼에서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너 1학년의 호시노랑 아는 사이지?”
“호시노? 아 에이엔, 네 아는 사이예요.”
“오 역시, 그럼 부탁 하나만 하자.”
“…무슨 부탁이요?”
“어려운 건 아니고 그 애 소개시켜주라.”
주장의 말에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던 손이 멈췄다. 귀에 들어온 말을 뇌가 처리하지 못한 것처럼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타이치를 보곤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는지 주장은 그녀를 어디서 봤는지, 어디가 마음에 드는지 줄줄 이야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에이엔에게 축구부 매니저도 부탁했다는 말까지 했을 때, 타이치는 귓가에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락커 문을 닫았다. 문이 부서질 거 같은 커다란 소리에 주장의 이야기가 멈추자 타이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 녀석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러니 주장에게 소개 시켜줄 수 없을 거 같아요. 말을 마친 타이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어깨에 멘 뒤 고개만 까닥 숙여 인사를 건네고 부실을 빠져나왔다. 타이치가 나가고 부실에 혼자 남게 된 주장은 처음 보는 타이치의 눈빛과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는지 팔을 문질렀다.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하지, 사람을 죽일 듯 째려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