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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시의 표현을 해석하자면…”

 

열심히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화창한 날씨의 따뜻한 햇살과 환기 차 열어둔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의 컬래버레이션에 수업이 도통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타이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입을 선생님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운동장은 체육시간을 즐기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학생들 사이에서 보랏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엔이었다.

수업이 축구인지 옆구리에 축구공을 끼운 채 요리조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신난 강아지처럼 보여서 타이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한참을 시범을 보인 뒤, 또 다른 친구들에게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리는 에이엔과 순간적으로 시선을 마주친 것 같아 타이치는 급하게 시선을 칠판으로 돌렸다.

 

‘어? 나 방금-’

 

왜 피했지? 스스로가 한 행동을 대한 내용을 뇌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타이치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고장 난 기계처럼 멍하니 있었다.

 

“야가미, 매점 가자!”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을 나갈 때까지 멍하니 있던 타이치는 제 어깨에 팔을 두르는 친구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친구가 무슨 말을 걸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음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3교시 후라는 애매한 시간임에도 매점은 많은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타이치는 도착하자마자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사람들 틈바구니로 뛰어든 친구를 기가 막힌 표정으로 바라봤다. 친구를 따라왔을 뿐 뭔가 살 생각은 없던 타이치는 사람이 적은 자리로 가려다 시선 끄트머리에 비친 에이엔을 발견했다. 그는 남학생에게 부딪혀 균형을 잃은 에이엔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손을 뻗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에, 타이치 오빠! 네, 괜… 괜찮아요.”

“뭐 사려고?”

“에? 아… 아이스티요.”

 

잠시만 기다려.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놓고 여전히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맨 앞으로 이동했다. 에이엔이 사려고 했던 아이스티랑 매대에 놓인 딸기 사탕 한 봉지의 계산을 마치고 돌아온 타이치는 그것들을 에이엔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사탕?”

“너 그거 좋아하잖아.”

“…! 고마워요!”

 

타이치는 감사인사를 하는 에이엔의 환한 미소에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볼을 긁적였다. 왠지 모를 어색함에 뭔가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에이엔- 친구로 보이는 여학생의 목소리에 에이엔은 타이치에게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고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야가미! 나도!”

“넌 네 돈으로 사 먹어!”

 

친구들에게 가는 에이엔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타이치는 어느새 왔는지 자기도 사달라며 등에 업히듯 매달리는 친구를 거칠게 떼어내며 매점을 빠져나왔다.

 

 

 

 

 

***

 

 

 

 

 

사건은 언제나 갑자기 일어난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날 갑자기 울린 디지바이스는 디지털세계의 새로운 위협을 알렸다. 하지만 그 위협에서 디지털세계를 구할 사람은 그들이 아닌 새로운 세대였다.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었기에 에이엔을 포함한 타이치 일행은 할 수 있는 선에서 새로운 선택받은 아이들을 도왔다.

늦은 봄에 시작된 디지몬 카이저와의 싸움 뒤, 아르케니몬이라는 새로운 적의 등장. 다크타워로 만들어진 디지몬 등등, 수많은 사건들은 후배들의 활약과 함께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이 다가올수록 안정세를 보였다.

 

“뭐야, 갑자기 불러내고?”

“사실은 저희가 선배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요.”

 

갑작스러운 부름에 다크타워 관련으로 일이 생긴 줄 알고 급하게 모였던 타이치 일행은 사람 수만큼의 거대한 꾸러미를 내미는 다이스케 일행을 보고 다들 입을 모아 그가 말한 선물이란 말을 되풀이했다. 기대해도 좋다는 말과 함께 꾸러미를 묶고 있던 리본이 풀리고, 안에서 디지털세계에 있어야 할 파트너 디지몬들이 나와 자신의 파트너에게 달려가 안겼다.

 

“에이엔!”

 

에이엔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품에 뛰어든 기기몬을 놓치지 않고 꼭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한 온기에 손에 한층 힘이 들어갔다.

생각도 못한 깜짝 선물을 준비해 준 다이스케 일행에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에이엔은 기기몬의 등을 쓰다듬어 주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데 다른 애들과 달리 왜 유년기 상태야?”

“성장기의 나는 다른 애들보다 크잖아? 히카리가 유년기면 에이엔이 날 껴안고 다니기 편하다고 해서 이 상태로 왔어!”

“기기몬~.”

 

에이엔은 좋은 제안을 해준 히카리에게 감사하며 품 안에 안겨있는 기기몬을 한층 꼭 안아주었고, 기기몬도 에이엔 품에 더 파고들었다.

무사히 선물 증정을 마친 다이스케 일행은 켄의 집에서 파티를 하기로 했다며 저녁에 있을 공연 준비를 해야 된다는 야마토와 함께 떠났다. 그들은 함께 공연을 보러 가기로 약속한 상태였지만 그때까지 각자 볼일을 보고 공연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뒤 헤어졌다.

 

공연이 시작될 때가 되었는데 약속 장소에 보이지 않는 소라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던 타이치는 야마토의 대기실 앞에서 그녀가 선물 상자를 든 채 머뭇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소라, 거기서 뭐해?”

 

한참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타이치의 목소리에 어깨를 들썩이며 놀란 소라는 자신이 들고 있는 상자를 숨기고 싶었는지 몸을 옆으로 돌렸다.

야마토의 대기실, 손에 든 선물상자, 추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붉어진 얼굴. 그녀에게서 보이는 것들로 상황 파악이 끝난 타이치는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일이긴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침착한 자신에게 쓴웃음이 나왔다.

 

가슴 한구석에서 이름 없는 감정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아직도 모른 척할 것이냐고?

타이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인정할 때가 왔다.

 

말소리를 들은 건지 가부몬이 대기실의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소라와 디지몬들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던 타이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열린 문 쪽으로 등을 밀어주었다. 다녀오겠다며 작게 미소 짓는 소라의 모습 위로 에이엔이 오버랩되었다.

 

'아-.'

 

에이엔을 소개해달라는 부장의 말에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왜 시선이 계속 그녀를 좇게 되는지-

타이치는 디지털세계의 위협이란 핑계로 계속 미루며 이름을 붙이고 있지 않던 그 감정에 이름표를 달았다.

 

이는 사랑이었다.

 

 

 

 

 

***

 

 

 

 

 

“사전에 정해놨던 장소로 에이엔 불러놨어요.”

“코시로 고마워!”

 

감사의 인사와 함께 끊긴 전화를 바라보다 주머니에 넣었다.

에이엔의 첫사랑의 시작과 애틋한 외사랑까지 모두 옆에서 봐왔고, 때론 슬퍼하는 그녀를 달래기도 했기에 걱정이 앞섰다. 괜찮을까? 목 언저리에서 맴돌던 속마음이 결국 입 밖으로 나왔다. 마리는 걱정 말라는 뜻을 담아 코시로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을 거야. 어차피 우리가 끼어들 수도 없고 해 줄 것도 없는 걸? 그리고…”

 

에이엔은 계속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따스한 봄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몸을 실은 분홍 벚꽃 잎들이 하늘하늘 춤추듯 흩날리는 날.

 

“오랜 시간 동안 널 상처 줬던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없을 수도 있지만, 너의 옆자리에서 사랑을 줄 기회를 주지 않을래?”

 

2년의 짝사랑을 포함한 총 4년의 외사랑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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