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맑은 느즈막한 점심때에 두사람은 신사 앞에서 합장을 했다. 짧은 침묵과 함께 바친 위에는 이나리즈시와 유부, 각종 과일이 놓여있었다. 설화에 따르면 여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유부라고들 하지만 진짜인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감사의 말을 하고 신사 주위를 정리하는 시즈카를 보며 긴토키는 심드렁하게 그녀를 도왔다. 멀쩡하게 복구되어 자신을 빤히 보는듯한 여우석상에 긴토키는 괜히 기분이 찜찜해졌다. 간단한 절차를 끝낸 두 사람은 신사를 떠났다.
"일은?"
"의뢰인 오기전까지 넉넉해."
'그럼 저녁거리 사가자.' 그녀는 냉장고에 부족한 재료들을 손에 꼽으며 거리를 걸었다. 긴토키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중간중간 말을 보탰다.
시즈카가 일어나지 않아 부적을 찾으러 거리를 뛰어다닌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일어나자마자 긴토키가 외로울까봐 더 안 자겠다는 소리를 하는 그녀에 그는 그런 적 없다고 되받아쳤었다. 하지만 걱정을 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녀도 그걸 알기에 그런 소리를 한거겠지만, 농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괜찮다던 그녀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였는지 이전처럼의 생활패턴을 되찾았다.
"카레 어때?"
"좋지."
지금처럼 저녁 메뉴를 고르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언제까지 미뤄둘 순 없었기에 긴토키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그거, 왜 그런건데?"
아직 그녀가 잠든 이유를 정확히는 모른다. 어느 정도는 유추했지만 앞으로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게하기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었다.
시즈카는 그를 보지않고 입을 열었다.
"별 일 아니였어."
"사람을 몇이나 고생시켜 놓고 별 일이 아니냐."
"그건 긴토키가 내가 일어나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멋대로 케츠노 가문에 쳐들어 온 탓이잖아."
"쓸데없는 얘기는 좀 넘어가자. 응? 그보다 너 그거 누구한테 들은건데?!"
"세이메이씨한테."
걱정해줘서 고마워. 이어진 말이 장난스러웠지만 긴토키는 웃을 수 없었다. 표정은 여전하지만 쑥스러운지 말투가 곱지못했다. 그런 그를 보며 작게 웃은 시즈카는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덧붙였다.
"조금 피곤했었나봐."
이제는 몇달 전의 일이지만 긴토키 일행은 케츠노 가문의 남매를 도와준적이 있었다.
봉인에서 풀린 악귀 안텐마루가 깨어나고 그것을 물리친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긴토키였다.
안텐마루를 물리친다고 난생 처음으로 영력을 쓴데다 그녀의 체질 또한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벌써 꽤 시간이 지난일이고 두 가문의 사이도 나쁘지 않아졌지만 그때 겪은 충격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이나리 신이 깃든 동상을 깼다는 것 하나로 이렇게까지 오래 영향을 받을줄은 몰랐으니까. 몸이 피곤하면 절로 잠이 늘기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몸살 감기에 걸린거지."
"아~그래?"
긴토키는 다행이라는 듯이 능청스레 말했다.
"-라고 할 줄 알았냐 이아가씨야."
콱하고 시즈카의 머리가 붙잡혔다.
꾸욱꾸욱 조이는 악력이 긴토키가 짜증이 났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빨리 바른대로 불어. 너 다 알고 있었지?"
그렇게 단순한 문제였으면 애초에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내용은 세이메이가 유추한 이유와 똑같았으니까. 그가 궁금해 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긴토키는 지금 그녀를 탓하고 있었다.
자신의 상태를 다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미리 대처하지 않은건지, 그리고 그걸 왜 우리한테 말해주지 않은건지.
말만 의문문이지 거의 확신하고 있는 긴토키에 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
"알아도 어쩌겠어."
나도 이럴 줄 몰랐어. 그녀는 뒤이어 말을 덧붙였다. 꿈자리가 뒤숭숭해 불온한 일이 일어날 거라걸 알고 있었지만 결국엔 동상이 깨지는 사단이 났다. 적어도 긴토키에게 피해가 가지않은 게 다행이였다.
"앞으로는 말할게."
"……"
무어라 말할새도 없이 순순히 사과를 건네는 그녀에 긴토키는 말문이 막혔다. 주먹을 쥔 손이 하얗게 변한걸 보면 화를 참고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긴토키는 목에 핏대를 세운체로 고뇌하고 있었다.
이걸 때릴수도 없고.
결국 긴토키는 분에 못 이겨 비명도 고함도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단말마를 지르고는 평온을 되찾았다. 내뱉는 말이 으르렁거리는 걸 보니 완벽하게 풀리지는 않은듯하지만.
"만약에 안 물었으니까 말 안 했다는 소리 같은 거 할거면 어디가서 나랑 친구라고 하지마라."
"……"
"거기서 왜 다무는건데?!"
하기싫냐? 이때다 하고 절교하는겁니까?
꾸우욱 하고 그녀의 볼이 가차없이 눌러졌다. 혹여나 하고 말을 꺼낸 긴토키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릴적부터 하나도 바뀐 게 없는 레파토리였다.
만약 그가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펑소처럼 지냈을 것이다. 깨어난 그녀는 말도 꺼내지않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마냥 굴었을테니까.
"반성하고 있어.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얼얼한 볼을 붙잡고 봐달라고 하자 그제서야 긴토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제대로 된 약속을 받아낸 그는 궁시렁거리며 마트로 발걸음을 향했다.
해가 몇년이 지나도 이 여자와 관련되면 미련해지기 일쑤였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주 지긋지긋했다. 멋대로 걱정시키고 멋대로 휘두르고 아주 제맘대로지. 불쑥 차오른 짜증 비슷한 감정에 긴토키는 미간을 찌푸렸다.
깨어나면 탈탈 털어먹겠다는 다짐을 그는 잊지 않았다. 술 한잔 가지고는 턱도 없다고 자신의 고생을 어필하는 긴토키에 시즈카는 얼마든지 사주겠다며 그를 달랬다.
. . .
장보기를 마치고 가득 짐을 들은 그들은 사무소로 향했다. 카레로 정했던 저녁 메뉴는 긴토키의 변덕으로 그가 좋아하는 것들로 잔뜩 꾸려졌다. 시즈카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고보니, 상자 용케도 찾았네."
"상자?"
아, 긴토키는 기억이 난 듯 소리를 내었다. 부적과 스승이 준 책이 담긴 상자는 시즈카가 깨어나자마자 건네줬었다. 아마 지금쯤 그녀의 집에 놓여있겠지.
"나중에 다시 가져갈려고 일부러 안 살필 거 같은곳에 둔건데."
"찾는 건 이쪽 특기거든."
물건부터 시작해서 사람은 물론 동물까지, 무언가를 찾는 건 해결사의 단골 의뢰였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그녀에게 한 방 먹긴 했지만, 결국은 찾아냈으니 그가 이긴거랑 다름없었다.
부적이라고 하니까 절로 카츠라와 함께 거리를 뛰어다닌 웃지 못할 기억이 떠올랐다.
"아~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사람 헷갈리게시리. 부적 찾다가 저번에 그 고양이한테 제대로 엿먹었어."
"고양이?"
"왜, 너랑 신사에서 찾은 그-"
"어라, 긴상?"
드르륵,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나온 신파치에 긴토키의 말이 잘렸다. 타이밍이 맞았던걸까. 양손에 짐이 많아 문을 열기가 귀찮았던 그는 잘됐다며 신파치에게 짐을 하나 넘겼다.
"빨리 오셨네요. 뭐예요? 우와, 고기네요!"
고기라는 소리에 신파치의 뒤에 있던 카구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순식간에 복잡해진 현관에 긴토키는 안으로 들어가자며 그들을 떠밀었다.
"긴쨩, 의뢰 들어왔다 해."
저희끼리 하려고 했는데 마침 오셨네요. 긴토키는 짐을 내려놓곤 뻐근한 팔을 돌렸다. 금방 사 온 고기가 아깝지만 무엇보다 일이 먼저였다. 그는 일에 관해서라면 공가 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럼 내가 저녁 준비하고 있을게."
"어, 부탁해. 신파치, 의뢰는?"
"저번에 온 꼬마애한테서 온건데요.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의뢰에요."
뭐? 긴토키는 갑자기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쭈구려앉아 장 봐온 것들을 구경하던 카구라는 이렇게 생겼다며 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땀을 삐질 흘리는 긴토키를 뒤로 하고 펼친 종이에는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듯한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어설픈 그림이지만 붉은 리본에 새하얀 털.
"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특징을 지닌 고양이에 긴토키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적이 없을까. 이번엔 반드시 이 고양이를 거세해 버리고 말겠다는 긴토키의 외침이 처절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