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무라는 방 안을 둘러본다. 방은 10분 전 자신이 왔을 때와 다름이 없다. 구석에 쌓인 허름한 가구들과 휑한 공간.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창문 아래 침대와 그 곁의 작은 수납장과 의자. 불을 밝힐 도구 하나 없는, 해와 달만으로 밝혀졌던 공간은 변함이 없다. 허나 하나만이 다르다.
그녀가 없다. 500년간 이 창고에서 잠들어 있었던, 겨우 깨어난 존재가 침대에 없다. 햇살을 받으며, 잔잔한 바람을 맞으며 숨을 쉬게 된 신의 총아가 없다. 그 사실에 호무라는 소용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침대에 다가간다. 작은 수납장 위에 가져온 쟁반을 올린 후, 그녀가 누워있던 자리를 손으로 훑는다. 미미한 온기가 있을 거라 여겼다. 허나 거기엔 생을 지닌 자의 온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햇살의 따스함 조차도 담지 못한 천은 차가움조차도 없었다. 그럼에도 순백의 색은 햇살에 은은하게 빛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그다.
자신이 생각해도 꽤나 사고가 흐트러지는 감각에 냉정함을 찾아야함의 필요성을 호무라는 느낀다.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숨을 한 번 쉬기로 정한다. 눈을 감고 자연스러운 호흡이 아닌 의식에 의한 수동적인 숨을 들이쉰다. 강하지 않지만 창고에 어울릴 법한 먼지의 퀘퀘함이 맡아져 왔다. 팟하고 눈꺼풀이 떠지며 색이 다른 그의 두 눈동자가 드러난다. 분명 그리 큰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차이는 제법 크고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금색과 보라색의 눈동자가 침대 위를 살펴보며 무언가를 찾아보는 듯하나 찾지 못한 것인지 시선을 돌린다. 창고와도 같은 방을 나가며 이제는 사라진 정체를 투신태자는 떠올린다. 창고와도 다름없는 방을 채우던 은은하게 채우던 꽃의 향기와 신의 총아의 곁을 지켜주던 작은 꽃들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호무라는 방을 나서자마자 멈춘 채 사라진 총아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신의 총아가 깨어남에 따른 천계의 반응을 몇 가지 추려 내본다. 대부분, 아니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다. 일단은 자신들이 그녀의 신원을 보호를 하는 게 우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른 호무라는 500년 만에 깨어난 여성이 갈법한 장소나 그녀를 데려갔을 법한 인물을 추측하려 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곧 필요가 없어진다. 정확하게는 잊혀진다. 코끝을 스친 희미한 꽃향기에 그는 어디론가로 다리를 움직인다.
긴 다리가 멈춘 곳은 아까 찾아냈던 정원이다. 방금 전 총아에게로 갔을 때 다른 길로 갔기에 이곳을 지나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정원을 살핀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잔디와 높이 자란 들풀들, 녹조로 덮인 연못.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올린다. 거기엔 아까와 다름없이 제법 크지만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한 나무가 서 있다. 허나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무의 곁에 서 있다. 마치 이곳의 정원과 같이 소리 없이 그저 서 있는 존재는 그가 찾던 여성이다. 그렇기에 주저 없이 발걸음을 내딛는 호무라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린다. 코끝에 닿는 것들은 쌀쌀한 공기와 어딘지 먼지내음과 비슷한 짙은 풀내음이란 사실을 말이다. 더불어 그게 마치 그녀가 잠들어 있던 창고와 비슷하다고 느껴버린다.
"....."
"......"
대화가 없다. 아니, 애초에 반응이 없는 여성에 호무라는 입을 열지 못한다. 자신이 다가옴을, 발소리를, 쇠사슬의 날카로운 소리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총아는 나무를 올려다보는 자세에서 변하지 않는다. 호무라는 잠시 그러한 눈앞의 존재를 살펴본다. 침대에 누워있을 때와 변함이 없지만, 신장과 체구와 확실하게 와 닿았다. 더불어 허리의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머리카락의 길이도 알게 된다. 햇빛에 빛나 희미하게 갈색을 띄는 그 모습은 아까 누워있을 때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이다.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가던 시선에 무언가가 걸린다. 같은 검은색일 터인데도 무겁고도 불쾌한 물건이 가는 손목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 무거운 독점욕에 여성의 팔은 아래로 내린 채 움직이지 않는다. 길고 긴 쇠사슬이 잔디를 짓이겨 누르는 걸 신아의 총아가 알고 있을까 하고 시답잖은 생각을 하게 된다.
코끝을 지나치는 바람에 그제야 호무라는 시간의 흐름을 인지한다. 어떻게든 총아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함을 떠올린 그는 그녀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여성과 대화 자체가 오랜만이기도 한 투신태자는 대화의 주제를 찾아내기로 한다. 주제를 찾던 도중 문득 앙상한 나무에 뭐가 있을까 하고 호무라도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올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을 거라 여겼다. 천계의 벚나무들은 모두 그 아름다운 꽃을 모두 잃어버렸다. 마치 예전 천계의 비극으로 슬픔에 빠진 듯이 천계는 영원하면서도 덧없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눈앞의 나무 또한 벚나무이기에 당연하게도 무엇 하나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곳엔 천계의 기준으로도 오랜 기간, 하계라면 몇 백 년이란 시간동안 볼 수 없었던 작은 존재가 앙상한 가지에 맺혀 있었다. 나무의 가장 위쪽의 가지에 매달린 그 존재는 너무도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지나치기 쉬웠다. 옅은 분홍색의 존재에 투신태자는 작은 놀람을 느끼게 된다. 무엇 때문에 다시 저 존재가 나타난 걸까하고 의문을 품는 순간 떨어지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리 빠르지도 않지만 느리지도 않은, 하늘하늘 내려오는 그걸 호무라는 손쉽게 잡아낸다. 동시에 누군가의 시선 또한 알아차린다.
"......"
"가지고 싶나?"
"......"
연갈색에... 희미한 생이 붙은 눈동자가 자신과 손에 쥐어진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자신에게 미소를 보였을 때와 틀려 빛남도 잔잔함도 없다. 어째서인지 그게 아쉽다는 감상을 가지며 묻자, 끄덕이는 작은 머리. 원래 이러한 성격은 아니었던 걸로, 이렇게 어딘지 인형과도 같지도 않았던 걸로 호무라는 기억하고 있다. 멀리서 보았다 해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더라도 제천대성 일행과 있던 곳에서 작지만 여성의 웃음소리를 들었었다. 즉, 그녀는 분명 그들의 곁에서 감정으로 웃고, 그 비극에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화를 냈었다. 즉, 신의 총아는 평범하게 웃을 줄도, 화도 낼 줄 알았던 여성이었다. 그러했을 터인데 다시 잠에서 깨어난 여성은 아까의 미소조차도 지어내지 못하고 있다. 곁을 지켜주던 작은 꽃 한 송이 없이 말이다.
동정심이었을까, 아니면 총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아까 꽃을 부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호무라는 그것을 쥔 손을 내밀었다. 그에 따라 총아도 받아내기 위해 손을 내밀기 위해 팔을 움직인다. 허나 양 손목에 달려진 수갑에 의해 그 속도는 느렸다. 들렸던 소문 중 그나마 수갑 중에 무게가 적은 분류라고 들었으나 근육이 없어보이는 총아에겐 조금은 버거워 보였다. 정말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팔찌라고 여기며 호무라는 남은 한 손을 움직인다. 총아의 손목을 하나씩 제 손 위에 올려 제 앞까지 내밀도록 받쳐준다. 수갑이 있어 한 손에 다 들어오지 않았지만, 거추장스러운 시기의 상징만 없었다면 충분히 한 손을 감싸였을 가는 손목. 어린 모습의 제천대성과는 다른 의미로 그녀는 힘이 있는 존재로는 보이지 않는 현 투신태자다. 대신 낯선 남자가 자신에게 닿음에도 멀뚱멀뚱 바라보는 눈동자는 조금은 특이하다고 여기는 현 투신태자다.
짧은 시간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마친 호무라는 두 손을 내밀었음에도 작은 꽃받침 위로 오른손을 올린다.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조심히 움켜쥐던 손을 풀어내더니 곧 치운다. 그러자 거기엔 연분홍색의 작은 꽃 한 송이가 내려앉게 된다. 하찮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작디 작은 한 송이의 꽃을 쉬이 날아갈 것이며, 쉬이 짓이겨질 수 있다. 신의 총아는 그러한 꽃을 말없이 내려다보더니 손을 움직인다. 조심히, 조심히 가녀린 존재는 자신보다 더욱 가녀린, 곧 시들어 버릴 꽃을 제 손안에 쥔다. 마치 어린아이가 보물을 가진 것처럼, 모든 것에 지친 자가 단 하나의 추억을 되찾은 듯이 여성은 단 한 장의 꽃을 가진다.
이걸로 겨우 대화가 될까하고 입을 열려던 호무라지만 총아의 표정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날아가 버린다. 미소다. 다시 미소가 그에게로 향한다. 방금까지 인형과도 같이 무표정이던 여성은 미소를 지어낸다. 거기다 창고에서 보았던 때보다 더욱 화사하고도 생기가 넘쳤다. 똑바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또렷하고도 일순 반짝였다. 햇빛의 장난이란 사실을 알아도 그 투명함에 입이 열리지 않게 된다. 아아, 이 순간은 정말로 그녀가 신의 총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이렇게도 무력한 남자로 되지는 않을 거라 투신태자는 어느 의미 달관한다. 그 덕인지 겨우 그는 입을 열게 된다.
"처음..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대화는 처음이지."
"......"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투신태자 호무라, 감히 아가씨의 이름을 여쭙고 싶습니다."
"......"
무슨 장난이었을까, 아니면 너무도 오랜만의 여성과의 제대로 된 대화였기 때문일까. 호무라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이름을 묻는다. 만약 자신의 옆에 동료가 있다면 웃었을 게 분명한 상황에 과연 눈앞의 여성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녀의 자세한 상태도, 성격도 모르나 미소에 빛나가지 않는 반응을 보이길 내심 그는 빌었다.
후훗-
착각일까. 그러한 생각에 눈을 깜박이는 호무라.
후후-
그런 그의 귓가에 작지만 확실한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여성은 이번에는 웃고 있다. 창고 때와 방금과는 다른 모습은 어른과 아이의 경계선과 같으면서도 둘 다 아닌 듯한 분위기다. 대체 오늘 하루 신의 총아의 미소 모음집을 보는 듯한 일에 투신태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미소와 웃음을 볼 때마다 그는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할지 모르게 되어 버리고 있다. 정신을 조금 놓아버린 그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닿는다.
"처음 뵙겠습니다. 호무라씨."
"아, 응."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일 터다. 웃음소리 빼고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른스럽지만 순진한 목소리는 묘하게 친근하고도 평온하다. 이것도 신의 총아의 힘인가 하고 미약한 혼란에 빠진 투신태자라 밝힌 그. 조금은 당황하거나 경계를 할 줄 알았다. 아니, 눈앞의 여성이라면 그러지 않은 게 당연한 걸까. 그녀는 천계에서 이상한 일행들과 가까이 지냈던 인물이다. 그들도 이러한 그녀에 자신처럼 당황했을까에 대해 의문을 품은 순간 미소와 웃음소리가 그의 의식을 빼앗아 간다. 무슨 타이밍이었을까. 바람도 동참한듯 그들의 곁을 지나간다.
조금은 거센 바람이었다. 여성의 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흩날리고 펄럭인다. 차륵,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쇠사슬 소리가 울렸다. 어디선 온 것인지 모를 강하지는 않지만 짙은 꽃향기가 그의 코끝을 또 건드린다. 마치 누군가의 장난과도 같은 풍경이자 상황에서 여성은 또 처음 보는 미소를 지어낸다. 이제는 신의 총아인지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그 미소는 호무라에게 새겨진다.
"제 이름은 사유라. 만나서 반가워요. 친절한 투신태자씨."
자신이 지금 어떠한 심정인지도, 상황인지도 모르면서도 오늘 처음 본 자신을 친절하다고 말한 여성, 사유라에 호무라는 결국 미소를 지어낸다. 그는 확신하게 된다. 분명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녀와 어떠한 관계가 될지 모르나 자신은 이 미소에 이기지 못할 거라고. 그도 그녀를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말이다.
쇠사슬의 소리가 다시 울린다. 꽃향기는 더욱 짙어져 간다. 둘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후에 호무라는 첫 만남이자 시작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움을 담은 미소를 지은 채 그는 말할 것이다.
'우리의 시작은 꽃과 쇠사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