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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던 날씨는 어느덧 풀어져서 아침마다 추위에 떨며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다. 드디어 봄이 오는구나. 오지 않을 것 같아도 봄은 겨울을 지나 반드시 왔다. 땅에선 새싹들이 나무들이 새로 태어날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봄이 오는 느낌은 좋았다. 새롭게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은 좋았으니까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는 것도 좋았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정신은 어느 순간 바람을 타고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버려서 멍을 때리기 쉬웠다.

"카미야, 멍하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건가요? 그러다간 또 길 잃어요."

"아, 미안, 시노노메. 이제 곧 봄이 오잖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주위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네."

카미야는 멋쩍게 하하하 웃으며 제 볼을 긁었다. 그리곤 헛기침을 한번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물론 발걸음을 옮긴 곳이 제대로 된 길은 아니었지만.

"카미야! 그쪽이 아니에요. 하여튼, 사무실 까지 가는 길을 외울 때도 안됐나."

"으응? 하하... 좀 더 노력해볼게.."

가려던 길을 멈추고 몸을 돌려 골목길 쪽으로 카미야와 시노노메가 들어갔다.

벌써 학생들이 하교할 시간이었는지 좁은 골목길엔 여러 말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곧 졸업 시즌이네요."

"아아, 그러네. 뭔가 시간이 빠르네. 우리도 얼마 전까진 저런 학생이었는데."

카미야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았다. 가쿠란을 입은 남학생들 블레이저를 입은 학생들... 그러다 문뜩 카미야의 연갈색 눈동자엔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과 가쿠란을 입은 남학생이 같이 걸어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도 알고 있고 평소에도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그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왔다.

"...그리운걸."

짧은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시노노메의 귀엔 제대로 들려왔다. 그립다는 말의 의미를 카미야와 같은 고등학교 동창인 그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립다... 인가요. 그러고 보니 3년째네요. 저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후후, 그러네."

"...그 뒤로 연락은 계속 없었죠?"

"응.. 그래도 인연이 닿는다면 분명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해. 아, 기억해? 유키노… 프로듀서가 되겠다고 했잖아. 어쩌면 일하면서 만날지도 몰라."

유키노라는 이름을 내뱉고 나니 너무나도 그리운 기분이 들어 계속 그 이름을 곱씹었다.

실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예전엔 매일매일 그 이름을 제 목소리로 불러주었건만 지금은 그러지 못하였다. 당사자가 지금은 옆에 있지 않았으니까.

"……."

"...더 늦기 전에 어서 돌아가죠.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시노노메의 말에 카미야는 정신을 차린 듯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다행이도 틀리지 않고 한번 만에 제대로 된 길로 걸어갔다.

계속 걸어가다 보니 금방 사무실 건물에 도착 할 수가 있었다. 맨 아래층에 있는 도시락 집 점원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잠겨있지 않은 낡은 문을 열자 사무실 안은 다소 소란스러웠다.

 

"다들 무슨 일이지? 평소보다 소란스러운 거 같은데……."

"새로운, 프로듀서 님, 온대!"

피에르가 먼저 활기찬 얼굴로 카미야에게 대답했다. 그 옆에 있던 미노리가 마저 이어서 좀 더 자세히 말을 보충해주었다.

"아무래도 사장님이 어디서 스카우트 해오신거 같아. 켄 군은 아직 못 봤다고 했고……. 내일 부터 정식으로 나온다고 하던걸. 그래서 그 이야기 중. 유키히로는 어떤 사람이면 좋을 거 같아?"

미노리의 말에 카미야는 다소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사실 새로운 프로듀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특정 인물로 단정 지어놓고 있었다. 아까 했던 이야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문학 작품으로 친다면 마치 아까 나눈 이야기가 복선이 되는 샘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가 온다는 생각뿐이었다. 유키노.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 소중한…….

"…아, 저는 성실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가끔 엉뚱하긴 해도 맡은 착실히 하는 그런 사람이요. 항상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하하.. 조금 이상했나요?"

"아뇨, 이상하다기 보단 뭔가 따로 사람을 정해두고 이야기하는 느낌이어서..."

"그러게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다던가?"

"아뇨... 그런 건... 아, 그것보다 사키와 다른 사람들은 못 보셨나요?"

카미야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시노노메도 아까부터 옆에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나머지 카페퍼레의 멤버 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세 사람이라면 아마 회의실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고 보니 새로 올 프로듀서의 모습도 봤다고 한 거 같은데……."

그 말에 카미야는 묘하게 심장이 뛰었다. 어쩌면 그들이 본 사람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모습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어서 회의실로 들어가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다.

"맞아, 나, 들었어! 엄청 예쁜, 사람! 이라고 했어. 그리고 눈이 벚꽃, 같았대!"

"...벚꽃 같다는 건?"

"아, 왔구나! 늦어지는 거 같아서 우리먼저 회의 시작했다구~"

밖이 더 소란스러워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사키가 회의실 밖으로 빠져나와선 두 사람을 불렀다. 늦은 만큼 더 회의 할 거니까~ 사키는 두 사람을 재촉하며 회의실로 다시 들어갔다. 사키를 따라 바이트에게 인사를 하고는 두 사람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말이야 새로 올 프로듀서 이야기를 하니까 유키히로 평소와는 조금 달라보였지?"

"예.. 뭔가 있는 걸까요?"

 

 

 

"그것보다 소이치로랑 카미야도 들었지! 새로 오는 프로듀서 말이야!"

"예, 바이트 분들이 이야기 해주셨어요."

"사실 저랑 사키쨩은 아침에 스케줄 때문에 일찍 왔다가 그분을 본거 있죠!"

"...그래? 어떤.. 사람이었어?"

"음, 자세히는 못 봤지만 엄청 예쁜 분이셨어요. 아이돌을 해도 될 거 같은? 아 그리고 눈이 정말 예쁘셨어요!"

"응응! 벚꽃 같은 색이었어! 금방이라도 만개 할 거 같은 벚꽃이 그대로 떠오를 정도로 예쁜 눈!"

사키의 말에 카미야는 제 심장이 다소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기대해버려서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엔 같은 눈 색을 가진 사람이 많을 텐데도 본능은 그런 생각을 일절 하지 않았다. 어서 이름이라던가, 다른 특징을 더 캐묻고 싶었다. 만약, 만약 정말로 그녀라면…….

"카미야여!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응? 아, 아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봄이 와서 그런가? 조금 더워진 것 같아. 하하... 그건 그렇고 그 프로듀서의 이름은 알아?"

"네? 아, 음 언뜻 사장님이 말하는 걸 들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으음……."

"아!!"

"기억났어?"

카미야는 아슬아슬하게 평정심을 유지 중이었다. 만약 익숙한 그 이름이 나와 버린다면 금방 깨져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아니, 이름이 생각난 건 아니고... 이름을 들었을 때 카미야의 이름이랑 비슷하구나~ 하고 생각했던 거 같거든."

"맞아요! 카미야 씨의 이름인 '유키히로'랑 비슷한 느낌? 분명 이름에 '유키'가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귀로만 들은 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요."

사키와 마키오의 말에 카미야는 완전히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카미야와 그녀, 유키노는 발음이 똑같네─ 라는 이야기를 자두 듣곤 했다. 한자까지 똑같지는 않았지만 말로 부를 땐 그 차이를 알 수 없으니까. 이럼에도 그녀가 아니라면 두 사람의 인연은 완전히 끝이라는 거겠지. 하지만 카미야는 아닐 거라는 경우는 생각 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녀여야만 했다. 이 생각은 옆의 시노노메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그건 그렇고 이제 그만 회의를 시작하죠. 더 이상 지체 하다간 스케줄에 못 맞출 거예요."

시노노메 덕분에 비로소 다음 스케줄 촬영에 관한 회의가 시작되었지만 카미야는 제대로 집중을 할수가 없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기에 나머지 멤버들도 다소 불안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꽤 오래 제 리더를 봐왔지만 이런 모습은 거의 처음이었기에. 물론 시노노메는 제외였다.

"카미야. 제대로 집중하세요. 내일이 되면 전부 알게 되니까요. 그때까진 눈앞의 일에 집중해주세요."

"아... 응. 미안해. 조금 꼴사나웠을까."

"당연하죠. 내일 새로 온 프로듀서 씨가 이 모습을 본다면 한숨부터 쉬겠어요."

"하하.. 그렇겠지. 응. 다시 집중할게"

"두 사람~! 둘이서 무슨 비밀이야기중이야?!"

"미즈시마 씨 말대로 비밀이야기니까요? 후후, 대신 카미야는 이제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 마저 진행하죠."

카미야는 옆의 제 친구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도와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예전의 기억들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찾았다."

집에 돌아온 후 목욕을 마치고 제방에 돌아온 카미야는 수많은 사진들 속에서 고등학교 시절의 사진을 찾아내었다. 카미야의 손엔 과거 그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남학생의 모습과 어떤 여학생의 모습이 나란히 담겨있는 사진이 있었다. 이 여학생이 바로 유키노였다. 사진 뒤엔 정갈한 글씨로 [유키히로]라고 적혀있었다. 제가 적어둔 글씨는 아니었고 같이 사진을 찍은 그녀가 적어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진은 똑같은 게 한 장 더 있었으니까. 헷갈리지 않기 위해 이름을 써둔 것이리라.

오랜만에 보는 사진속의 소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벚꽃을 떠올리는 분홍빛 눈동자는, 새카만 머리카락 덕분에 더욱 눈에 뛰었다. 한번 본다면 절대 잊을 수없는 눈이었다.

"너는 여전히 이 모습 그대로일까? 어쩌면 내일 다른 사람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너라고 믿고 싶어. 너를 정말로 만나고 싶으니까. 너와 다시 이야기를 하고 너를 다시 알아가고 싶어져. 미쳐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끝내자."

꺼낸 사진은 미리 준비해둔 작은 액자에 넣어 서랍장 위에 올려두었다.

그는 사진을 계속 응시했다. 미안해, 네가 날 싫어한다고 해도 난 역시 이 마음을 포기하지 못할 거 같아.

"이런 게 멍청하다는 거지?"

혼잣말로 중얼 거린 채 카미야는 침대로 들어갔다. 내일을 위한 컨디션 조절도 중요하기에.

눈을 감았지만 옛일이 떠올라 계속 곱씹었다. 처음 만났을 때라던가, 같이 하교를 하던 날의 추억 같은 것들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어.

그날의 꿈엔 예전의 일이 뒤죽박죽 섞여 나왔다. 다시 만날 거라는 예감은 더욱 확실해졌다.

 

 

 

 

"음~ 나도 모르게 일찍 와버렸네."

문을 열었는데 네 모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 할 텐데 말이야.

카미야는 늘 그렇듯 건물을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은 어쩐지 길도 조금만 헤맸기에 예상보다 훨씬 일찍 사무실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사무실을 찾아오는 길에 맺혀있던 벚꽃 봉오리들이 자신을 안내 해준 것만 같이 느껴졌다.

"시노노메가 알면 엄청 놀라겠는데……."

손목시계의 시간을 한번 확인하고는 사무실 문의 문고리를 돌렸다. 안에선 사무원인 켄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카미야의 심장은 다시 강하게 요동쳤다.

시간이 흘러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있기 마련이었다. 아직 자신은 제 부모의 목소리와 얼굴도 기억하고 있는데, 소중했던 친구의 목소리를 잊었을 리가 없었다.

사실 꿈인 걸까? 꿈이라면 길을 잃지 않은 것도 설명이 되겠지. 카미야는 슬쩍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픔이 느껴졌다.

"다행이 꿈은 아니구나."

카미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 옷 괜찮던가. 머리는 제대로 정돈되었던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보이진 않겠지? 묘한 불안감을 안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켄이 먼저 그를 발견하곤 인사를 해주었다.

"어라, 카미야 씨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그것도 혼자서... 아, 여기 이분은 오늘 새로 오신 프로듀서분이세요!"

켄이 소개한 사람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머리카락은 잘 관리하였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고개가 완전히 돌아가서는 드디어 카미야와 눈을 마주쳤다. 그곳엔 먼저 찾아온 봄이 있었다.

아아, 정말로 기다렸어.

둘 다 동시에 숨을 들이마셨다. 놀란 얼굴이 서로의 눈동자에 담겼다. 뭐라고 먼저 말을 꺼내야하지? 자꾸만 망설여졌다. 이름을 먼저 불러야 할까? 오랜만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해야 할까? 여러 생각들이 뒤엉켜서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켄은 조용히 그 모습을 보며 고개만 갸우뚱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어라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에 어쩐지 입을 열수가 없었다.

"아... 카...!"

"……보고 싶었어, 유키노."

제 앞의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카미야가 먼저 선수를 쳤다.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말이었다. 늘 혹시나 만나게 된다면 이런 말을 해야지 하고 생각해둔 것이 있었을 텐데 어째선지 바로 떠오르지 않아 입을 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름이 불린 유키노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신중히 내뱉을 말을 고르고 있는 중이리라.

"아, 응. 나도...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카, 카미야……."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는 다소 작았고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붉어진 뺨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익숙한 모습에 카미야는 절로 따스한 미소가 지어졌다. 누가 봐도 이름다운, 애정이 가득담긴 미소였다.

"나, 유키노 너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아."

 

봄이 온다. 네가 있는 봄이, 너의 향기와 함께 나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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