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뜻이야…….
너를……. 부터……. 는…….
"우와! 진짜 이상한 꿈꿨다..."
자신의 침대에서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킨 유키노는 이미 자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더 헝클였다. 잠에서 깬 지금은 어딘가 기분이 이상한 개꿈이라는 느낌밖에 남지 않았지만.
머리맡에 올려둔 휴대전화를 들어 시계를 확인하니 얼른 씻지 않으면 미리 공지한 시간에 늦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상념들을 털어내고는 씻기 위해 정든 이불속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은 언제나의 모습이었다. 딱히 새로 일을 시작했다고 해서 변화를 주고 싶지는 않은 타입이었다. 음, 귀찮으니까.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이후로 쭉 이 머리였네."
슬쩍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관두었다. 그 기억 속엔 항상 똑같은 인물이 함께 나와 버리니까.
"오늘은 어떤 표정으로 대해야할까."
프로듀서 어서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사키가 그녀를 반겨주었다. 앞에서 그녀와 이야기 하고 있었던 마키오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이곳 315프로덕션에서 일한지도 꽤 시간이 지났고 아이돌들과도 꽤 친해진 듯 보였다.
"두 사람 다 일찍 왔네?"
"응! 오늘 촬영이 기대돼서 말이지~ 파핏하고 일찍 와버렸다구!"
오늘은 이들이 속한 유닛 카페퍼레의 화보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얼른 이 옷 저 옷 잔뜩 입고 싶어져~!"
어느 옷가게에서 협찬이 들어와 다양한 옷을 맘껏 입어볼 수 있어서 그런지 사키는 제법 신이난 표정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 아스란 씨나 소이치로 씨는 촬영 중간 저희가 먹을 간식거리를 만들어서 올 거라 조금 늦을 거 같다고 전해 달랬어요. 음... 카미야 씨는 아마 길을 잃었을 거라고 생……."
"뭐? ……그 점은 여전하구나... 일단 연락 해보자."
"그게 아까 해봤는데 안 받더라구 배터리가 다된 걸까?"
자기 전엔 충전해놓고 자는 게 국룰아냐? 유키노는 머릿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간을 한차례 확인했다. 찾으러 가볼까? 그래 찾으러가자! 생각을 정하는데 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카미야를 찾으러 가볼게 너희는 여기 있고……. 나머지 두 명이 도착하면 말 좀 해줘. 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카미야가 오면 연락도 부탁해..."
유키노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프로듀서 님. 카미야 씨를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꽤 자신있어 보이는 표정이었구, 어딘가 즐거워 보이기도 했어. 가능하지 않을까?! 프로듀서 카미야랑 친구라고 했고!"
"음, 이쪽은 큰길이네 저쪽으로 가봐야겠다."
유키노는 제법 능숙하고 익숙하게 차근차근 길을 짚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추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익숙했다.
"아아, 고등학교 때 하던 짓을 또 하게 되다니."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며 걷고 있으니 어디선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로 계속 걸어가니,
"오늘 날씨가 좋지. 너도 길을 잃은... 건.. 아니겠네. 그럼 혹시 내가 가야할 길을 알고 있니?"
익숙한 풍경이었다. 키가 큰 그는 담장 위에 쉬고 있는 고양이에게도 손쉽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어딘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어딘가 불편하기도한 감정이 한 번에 같이 올라왔다. 그리고 어째선지 자신이 들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
그녀는 제 분홍빛 눈동자를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찾으려는 사람은 찾았다. 이제 그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가면 끝이건만 어째선지 입이 금방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예전처럼 그를 대해도 되는 것일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먼저 그녀를 발견했다.
"응? 유키노?"
"아, 어... 그러니까. ...돌아가자."
너무 놀란 나머지 바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돌아가자. 이 말에선 어째선지 향수가 느껴졌다. 그리운 향기가 풍겨져왔다.
"날.. 찾으러 와준거야?"
"당연하지. 얼른 가서 촬영장에 갈 준비해야 한다구. 그리고 휴대폰은 좀 충전 해놓고 자."
익숙하게 그에게 잔소리를 했다. 하고나서 아차 싶었다. 너무 예전 친구처럼 대했나?
"하하.. 응, 미안해. 그리고 정말 오랜만이네 그렇게 너한테서 잔소리 듣는 거."
다시 만나서 다행이이야. 작게 중얼거린 소리는 담장위에 있던 고양이가 가지고는 사라져버렸다.
카미야는 웃으며 유키노에게로 다가갔다. 어쩐지 익숙했다. 꼭 다시 예전처럼 돌아간 것 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늦었으니까 얼른가자. 내 뒤... 잘 따라올 수 있지?"
"...그렇지 않을까? 노력해볼게 사무실까지 가는 길은 그래도 익숙한 편에 속하는걸."
"아... 어..."
길 잃은 애가 할 말인가? 싶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그녀는 앞에 서서 걸어갔다. 카미야는 그런 뒷모습을 한번, 미쳐 잡지 못한 손을 한번 보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뒤를 따라 걸어갔다.
"촬영 정말 재밌었어!"
촬영장 근처에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있었기에, 마침 사람도 없을 시간이라 카페퍼레와 프로듀서는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사키는 촬영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좋게 떠들고 있었다. 유키노는 그런 아이돌의 모습을 한 발짝 떨어진 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카미야를 찾으러갔을 때 카미야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워~ 놀래라. 넌 사람 놀라게 하는데 재능 있는 거 같아 예전에도……."
말을 하려다 말았다. 자신에겐 적어도 옛날 일을 웃으며 이야기할 자격은 없다.
"...아무튼 카미야랑은 화해는 했나요?"
"아니. ...애초에 저쪽에서 나를 그렇게 보고 있지 않아.. 화내주면 좋을 텐데."
"그런가요. 뭐 그는 워낙에 물렁거리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카미야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요?"
유키노는 시노노메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게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하고 오히려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이 얄팍한 양심조차도 없었다면 마음 놓고 지낼 수라도 있었을 텐데.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은 금방이라도 물에 젖어 찢어질 것 같은 양심은 단단히도 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행동을 더욱 애매하게 만들었다.
"난 모르겠어……."
"...이것만큼은 기억해두세요 당신이 애매하게 행동 할 때마다 카미야에겐 더 큰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요."
그런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어.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미숙했다. 그렇기에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자꾸만 망설였다.
"소이치로! 주인! 얼른 오지 않으면 이 끝없는 미지의 세계에 버려지게 된다고?"
"네네, 금방 가겠습니다. 아무튼 똑같은 실수는 하지마세요."
유키노는 여전히 조금 떨어진 채로 걷고 있었다. 뒤에서 보는 편이 앞에 걸어가는 사람이 한눈에 보이고 편했다. 혹시 누군가 길을 잘못 가더라도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
지금처럼.
"잠깐만! 혼자 어디로 가는 거야?!"
또 자기혼자 방향을 잘못 잡아 다른 길로 가던 카미야를 유키노는 바로 그의 팔을 잡아 저지했다. 앞서 가던 이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듯 한참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으응? ...음, 고마워."
"알면 잘 좀 걸어가 봐."
"아하하, 이러니까 꼭 예전으로 돌아간 거 같아."
예전에도 늘 이런 느낌이었는데. 카미야는 웃고있었지만 그리움과 쓸쓸함이 함께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과거의 두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망설이고 있었다. 한번 깨진 관계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두려웠다. 이미 깨져버린 것은 아무리 붙여도 균열이 남기 마련이었다. 깨끗하지도 않다. 그렇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다.
"있지, 카미야. 너는 내가 밉지 않아? 싫지 않아? 그렇게 너를 떠나버렸는데……."
그렇게 말하는 유키노의 얼굴은 일그러져있어서 카미야는 어딘가가 아려왔다. 왜 그렇게 슬픈 표정 짓고 있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꺼내지 못하는 말은 삼켜버렸다. 지금 이 말을 했다가는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 차라리 정말 유키노 그녀가 원하는 대로 화를 내고 크게 싸울 수 있었다면, 그러고 나서 서로 화해를 하게 된다면, 다시 깨지지 않은 새것으로 시작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미야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면 아직도 그녀를 여전히 너무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 날 이후 상처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바보같이 사랑을 하고, 깨진 것을 제 품에 가득 안고 있기만 하니까.
"나는……."
카미야는……
"나는... 여전히 너를 좋아하고 있어. 너를 한 번도 거짓으로 좋아했던 적이 없어. 나는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 까지 진심으로 너를……."
지금의 그녀에게 하지 말아할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