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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유키노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아아, 너는 왜 나에게 한없이 무르고 다정한 거니 내가 널 상처 낼 수밖에 없잖아...

"..."

"..."

두 사람사이엔 정적만이 흘렀다. 유키노도 카미야도 선뜻 얼굴을 들어 상대방을 똑바로 응시하기 어려웠다.

"모르겠어... 나는……. 나 도저히 마음이 편해지지 않아…….“

"..."

유키노는 카미야의 마음을 가지고 멋대로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해먹었는데. 이런 식으로 넘어가버린다면 유키노는 또 다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을 자기 멋대로 휘두르고 싶지 않았다.

"네가 힘들 거야……. 난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난.. 낫지 않는 병이들어있다구."

목소리는 떨렸지만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속에 있던 말을 조금 드러내었다. 유키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런건……."

"정말이지~! 두 사람 거기서 뭐하고 있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키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나머지 카페퍼레 멤버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키노는 무어라 말해야 된다는 걸 알았지만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채 질끈 제 분홍빛 눈동자를 감았다.

"....미안. 지금 갈게. ...프로듀서랑."

카미야는 먼저 유키노를 가로질러갔다. 따스하기만 했던 갈색의 눈동자엔 차가운 슬픔이 서려있었다.

"다른 애들이 걱정하니까... 얼른가자."

목소리는 작게 속삭였다. 유키노도 감았던 눈을 떴다. 눈가는 제법 촉촉해져있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온 유키노는 그대로 침대에 뻗었다. 오늘 본인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뒤죽박죽 섞여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던 중 휴대전화가 울려 급하게 화면을 확인해보았다.

"할머니..?"

[어, 그래. 거기 생활을 할 만하니? 넌 원래 좀 예민했잖니.]

"아.. 전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이젠 익숙해졌는걸요. 이곳생활은……. 그런데 따로 용건 있으셔서 전화하신 거예요?"

[아아, 그게 말이다... 너희 아빠에 대한 이야기인데..]

"죄송해요. 그 인간이야기는 나중에 들을게요. 시간도 늦었는데 할머니도 이만 주무세요. 조만간 찾아뵐 테니까."

뚝. 전화를 끊었다. 평소라면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유키노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라면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관계를 끊고 싶어."

유키노는 침대에 엎드린 채로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어쩐지 악몽을 꿀 것같은 기분이었다.

 

 

"있지 유키노는 말이야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내 세계는 곧 깨져버리고 말았어."

"할머니집에 맡겨졌을땐 모든걸 포기하고싶었어."

...

"그런데 그때 그 앨 만나버린 거야! 내가 가장 힘들 때... 그래서 난 계속 의지해버렸어.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계속……."

마음 놓고 싶지 않아. 그럼 또 과거의 반복이 될 테니까... 그래서 그 애가 날 밀어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들어갈 틈조차 내어주지 않았으면 바랐다고.

"하지만, 내심 기뻤지?"

 

"...헉! ...지금.. 몇 시지?"

다행히 아직 새벽이었다. 유키노는 땀에 젖은 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방금 꿈을 꿨는지 꾸지 않았는지도 헷갈렸다. 하필 이럴 때 만나게 될건 또 뭐람. 왜 늘 내가 이런 상태일 때만...

숨을 고르고 얼굴의 땀도 닦아내고 나니 휴대전화에 온 알림을 이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기절하듯 잠이 들었을 때 문자가 온 모양이었다.

[내일 오전에 잡힌 스케줄 있나요? 오전 중에 만나서 이야기 할것이 있습니다. 저는 오프 이긴 합니다만... 오후에는 카페 개점을 하기에.]

발신인은 시노노메였다. 다행이 내일은 오후에 화보촬영 현장에 가는 것뿐이었다. 새벽 늦은 시간이지만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 대답은 오케이였다.

"할말... 시노노메랑 이야기하는 건 좀 무서운데.."

급하게 잡힌 약속을 위해 유키노는 오지 않을 잠을 다시 청했다.

 

 

 

약속시간과 장소는 시노노메가 정해서 답장을 보내주었다. 적당한 위치에 있는 패밀리레스토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네 이런 곳에 오는 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점원이 웃으며 맞이해주었다. 아마 유키노가 먼저 왔기 때문에 그녀는 적당히 구석진 자리에 골라 앉았다. 주문은 일행이 오면 한다는 말을 전하고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는 메뉴판을 가만히 응시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아, 왔구나."

"일단 마실걸 시키죠."

적당히 음료를 시키고. 또 그게 나올 때까지 서로 아무말이 없었다. 시킨 음료가 나오고 서빙해준 점원이 완전히 사라지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왜 그렇게 카미야를 밀어내는 건가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유키노는 찻잔에 뻗은 손을 그대로 멈춰야만했다. 그러고 보면 시노노메는 제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시절의 두 사람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

"저는 그저 지켜보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동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제가 모르는 일이 더 있는 건가요?"

유키노는 식어가는 붉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홍차가아니라 다른 차가운걸 시켰어야했는데.

"...네가 모르는 일은 아마도 없었다고 생각해... 단지 시노노메 네 눈에 비쳐진 모습이 조금 달랐겠지."

찻 잔의 손잡이만 계속해서 문질렀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지 그런 말……. 들어봤어? 사람을 낙원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말. 이렇게 해버리면 결국은 둘 다 지쳐버리거든. 그런데 그때 내가 그랬어."

유키노는 과거의 어느 한때를 떠올렸다. 지나친 남학생들의 관심에 지쳐있던 그녀는 그만 카미야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해버렸다. 처음엔 그저 다른 남자들이 자신을 귀찮게만 안 해주는 걸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키노도 카미야에게 진심이 되어갔다. 이렇게 되었다간 헤어질 수 없을 거라고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놀랐지? 사실 처음시작은 계약연애였어. 하지만 졸업 전엔 내 마음도 진심이란 걸 깨달아버렸어."

시노노메는 이제야 의문이 조금씩 풀려갔다.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다시 생겨났다.

"그렇다면 왜 헤어 진건가요."

"내 자신을 믿지 못했거든. 이런 식으로 좋아져버리면 분명 더 심한 요구를 하게되고 의존하게 되어버린다고 생각했어. 그만큼 나는 여유가 없었거든 그때 당시에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어.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놨다간 주위의 시선이 곱지 못할 거 같았고……. 그래서 최대한 괜찮은 척. 평범한 척을 했어..."

미지근해진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결말은 시노노메 네가 아는 대로 일방적으로 헤어지고 연락을 끊은 거지."

"확실히 그런 상태인줄은 몰랐어요. 근데 지금은 왜 그를 밀어내고 있는 거죠?"

"...당연하잖아. 난 그때와 달라진 거라곤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한 거뿐이야. 그리고... 내가 아직 카미야를 좋아하고 있거든. 이건 도저히 안 고쳐지더라."

"....그런 거군요. 그러니까 유키노는.. 그와 다시 사랑하게 되는걸, 두려워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결국은 그에게 모든 걸 의존 해버리게 된다……."

"응, 그거야. 난 그래서 그냥 날 미워하길 바랐고. 화내주길 바랬어. 그저 친구로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걘 내 생각보다 바보더라."

말하는 목소리는 의외로 덤덤했다.

"계속 두 사람을 보고 답답했던 이유를 알거 같네요. 유키노의 행동이 모순투성이였던 것도... 그런데 말이죠. 카미야는 분명 옆에서 잘 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당신이 의지해주는걸 더 좋아하겠죠."

"그런 가벼운 문제가 아니잖아.. 난 너희들 생각보다 더 심각해. 계속 있으면 분명 힘들어할 거야 난 그런 걸 보고 싶지 않은 거야. 내가 마음을 놓아버리면 힘든 건 카미야가 되니까……."

"유키노는 좀 더 자신을 믿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들어보지 못했잖아요. 물론 일방적으로 그런 취급을 당하면 누구든 힘들 거예요. 하지만 지금의 유키노는 카미야는 서로를 위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걸요. 분명 유키노가 생각하는 거보다 더 나은 상황이 될거라고 장담하죠. 카미야라면 가능합니다."

시노노메의 목소리는 자신에 차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장담할 수있는 걸까. 유키노는 혼란스러웠지만 지금껏 자기 자신을 너무 비관하며 믿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조금은 환기되는 것도 같았다.

"사람은 사람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어요.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그건 유키노같은 사람에겐 불가능에 가깝죠. 그러니 남에 보이는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람은 어느 한번은 꼭 남에게 도움을 받고 의지해야할 순간이 오기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뿌리치지마세요."

시노노메의 말 대로였다. 유키노에겐 이미 오래 전부터 카미야가 내밀어준 손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무시한건 자신이었다.

"정말... 괜찮을까?"

이젠 완전히 식어버린 찻잔을 유키노는 바라보고 있었다. 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식은 차는 다시 데우면 된다. 그리고 카미야는 식은 차를 다시 데워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라고 하긴 민망하지만,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건 사과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입장에서……. 저는 꼭 해야만 했어요. 정말 답답했으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용기정돈 내봐야겠지..? ...나 이야기해볼게 하지만……. 그전에 생각을 정리하고."

"네, 그 이후의 행동은 유키노의 마음대로니까요. 그리고 이건 진짜로 주제넘은 생각입니다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시노노메는 웃고 있었다. 유리잔의 남은 음료를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유키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카미야 뿐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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