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리만치 맑은 정신이다.
사유라는 눈을 뜨자 보인 낯선 목제로 이루어진 천장을 보면서 자신의 상태를 체크한다. 평소와 달리 일어난 직후임에도 흐릿함이나 몽실한 감각이 없음이 낯설기까지 했다. 분명 전혀 없던 경험은 아니다. 그럼에도 전에 없을 정도로 낯선 느낌에 그녀는 누워있던 몸의 상체를 일으킨다. 그로인해 가슴에서 흘러내린 무언가를 눈치챈다. 부드럽고도 폭신한 무언가는 자신이 쓰는 침구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침구였다. 허나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무심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유라다.
막 깨어났다기엔 제법 또렷한 눈동자는 주위를 살피기 시작한다. 이미 본 천장을 한 번 더 본 후, 벽과 바닥, 가구 등을 보며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을 추리한다. 누군가가 밟은 적이 없는 듯이 깔끔한 다다미, 눈이 평온한 색과 멋이 느껴지는 무늬를 지닌 벽지. 그리 많지 않지만 방에 놓인 목제의 가구들과 몇몇 인테리어품들은 심플하면서도 거슬리지 않았다. 대충 살펴보아도 일본풍으로 꾸며낸 고풍스러운 방은 억지로라도 평범한 가정집도, 병원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
방을 본 후에서야 겨우 열린 입. 허나 그 안에서 무엇도 흘러나오지 못한 채 다시 닫힌다. 숨조차 내뱉지 않은 채 사유라는 문으로 추정된 곳으로 향한다. 드르륵, 작은 소리와 함께 열린 너머로 보인 것은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발코니로 향하는 일종의 창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보여온 붉은색이 섞인 짙은 주황색의 세계에 문을 연 장본인은 움직이지 못한다. 연브라운색의 눈동자는 원래의 색을 모를 정도로 하늘의 색으로 물들어진다.
허나 그 모습은 어딘지 평소와는 틀렸다. 그 눈동자에 비친 아름다움을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언제나라면 하늘의 취했을 눈동자는 그 황홀한 세계에 빠져들지 못한다. 사유라는 제 가슴속이 평소와는 틀린 것을 느끼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망부석이 되어 서 있는다.
그렇게 시간을 모른 채 얼마나 서 있었을까. 사유라는 배후에 무언가가 놓여진, 내려온 듯한 소리에 뒤돌아 본다. 거기엔 노을에 물들여 졌지만, 그 푸름을 여전히 잃지 않은 존재가 서 있었다. 비록 사랑스러운 분홍색의 머리카락은 제 색을 잠시 잊은 듯했으나 푸른 눈동자 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네가 일어난 것을 확인하고 바로 왔는데 조금 늦었군. 미안하다. 사유라."
"저는 괜찮아요. 보로스."
제 귀에 닿는 목소리에 사유라는 겨우 다시 입을 열게 된다. 갑자기 나타난 것과 같은 연인에도 놀라는 기색없이 답한다. 그 모습은 평소와 차이가 없고도 어느 의미 그녀스러웠다. 사유라 본인조차 그리 생각했다. 아니, 생각 이전에 의심과 위화감조차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뿐더러 그의 행동도 언제나와 변함이 없어야 했다. 사유라는 그가 언제나의 자상한 미소로 답할거라 여겼다. 분명 낯선 풍경 속에서도 그다운 미소를 보여줄거라 여겼다. 하지만 보고싶던 광경을 현실은 그녀에게 내려주지 않는다. 대신 몸을 감싸는 따스함을 내려준다. 그게 곧 연인의 포옹이라는 걱정임을 알아 챈, 연인과의 여행을 기대한 여성은 입을 연다.
"저기.. 저 진짜로 괜찮아요. 보로스."
"사유라, 나는 너의 그런 거짓말에 속을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눈을 감기 전, 기차 안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며 사유라는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때와 달리 외계인씨는 힘을 준 표정을 바꾸지도 않는다. 더불어 전혀 짐작이 가는 바가 없는 단어까지 건네왔다. 그 말에 반사적으로 노을을 등진 여성은 부정한다.
사유라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여기게 된다. 맑은 정신에, 다친 곳도 없는 자신은 멀쩡하다. 그럼에도 상대방의 눈동자에선 걱정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제 많이 좋아진 자신이기에 최근은 이쯤되면 그의 걱정은 잠재워진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자신이 있는 곳은 낯선 곳이지만 그가 있기에 괜찮은 장소다. 그가 있기에 두려움이 줄어들 자신을 알 연인일 터인데도 커다란 청안에 괴로움이 고이기 시작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몸이 굳어지기 시작한다.
"인간인 네가 나보다 분명 감정에 대해 민감할 텐데. 가끔 이렇게 너는 너의 감정을 모르는군."
"무슨 말씀인지."
"내 잘못이다. 너를 불안하게 만들어 미안하다."
굳어진 자신에게 떨어지는 목소리는 질책과 짜증이 없었다. 하지만 적당한 단어도 찾지 못한 채 사유라는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묻는다. 그리고 들려온 보로스의 스스로에 대한 질책과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사과에 겨우 알게 된다.
자신이 낯선 장소에서 깨어나 그가 옆에 없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허나 허세였을까, 아니면 습관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까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아 몰랐던 걸까. 사유라는 자신의 감정이자 상태를 누구보다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즐거울 예정인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비롯된 거짓과 외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새로 발견한 나약함에 속으로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린다. 거기엔 아직 자신을 걱정스레, 미안함에 괴로워하며 바라보는 연인이 있었다.
"괜찮아요."
"......"
"본의 아니게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보로스가 있잖아요."
"하지만 너를 혼자 둔 것은 진실이다."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해요. 그러니 설명해주세요."
"너는 내게 너무 무르다. 때론... 그래, 화를 내도 좋다."
우스운 상황이다. 사유라는 간단하지만 설명이 부족한 감상을 내놓는다. 불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마자 안정이 되다니. 나약함을 발견했음에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것도 비뚤어진 쪽이 아닌 고쳐야 할 부분을 알게 된 안심감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한 이상함을 느끼며 보로스와의 대화를 이어간다. 이번에야말로 거짓말도, 외면도 없이 그에게 괜찮다고 전한다. 기차에서와 같이 전하는 자신에게로 그는 불만어린 시선을 보낸다. 아마 불만도 없는 자신으로 인한 벌을 받지 못한 죄책감 때문일 거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고도 그를 믿는 사유라로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들려온 외계인의 말에 조용히 품에서 빠져 나온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뒤로 물러선 여성은 더 보기 편해진 연인을 올려다 보며, 미소를 자아낸다.
"싫어요."
아아, 아니었다. 이건 웃음이다. 사유라는 미소를 짓자고 생각했음에도 흘러나온 말에 섞인 미약한 웃는소리에 속으로 정정한다. 그것도 어딘지 장난스런 아이와 같은 태도였다. 왠지 기차에서의 일들이 떠올리는 그녀는 바라보는 보로스의 반응을 기다린다. 헌데 어째서인지 놀람이 담긴 그 표정이 보여왔다. 또 이류 모를 상황에 말을 걸려던 노을을 등진 자는 봐 버린다. 듣게 되어 버린다.
보로스의 표정이 누가 보아도 환한 미소로 변한다. 거기서 더 커진 그 미소는 웃음으로 바뀌어 그의 입에서 살짝 올라간 톤의 웃음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전신을 노을을 품은 연인의 만면의 미소와 웃음소리에 사유라는 여행의 도중을 잊어버린다. 다가오는, 안아올리는 듬직한 몸과 팔에 반응을 하지 못한다.
"이건 무엇일까. 나는 지금의 이 기분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
"기쁘다는 것은 확실한데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어."
"......"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나는 이 여행에 만족한 것만 같다. "
무어라 할까. 사유라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얘기해오는 연인을 바라보며 그 모습에 무언가를 떠올린다. 아 그거다. 속으로 깨달음의 혼잣말을 만들어 낸다. 눈앞의 순수한 그 미소는 묘하게 아이를 연상케 했다. 마치 기쁨이란 감정을 처음 알게 된, 자각한 아이와도 같았다.
어쩔 수 없는 걸까. 그는 스스로 감정에 대해 무관심하고도 잘 몰랐다고 한다. 하물며 인간의 기준으로 말하는 감정은 더욱 모르겠다고도 했었다. 그렇다면 그는 경험과 지식도 적은 아이와도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인간은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자신은 인간임에도 여러가지를 거부해 왔기에 감정을 잘 모른다. 그 부분들이 어릴적에 멈춘 자신은 다른 의미로 아이였다. 사유라는 보로스 몰래 서로가 틀리지만 닮았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만든다.
"저도 모르니 함께 그 기분이자 감정을 알아가봐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만."
"그럼 저를 그때까지, 그때보다 더욱 오래 함께 하도록 만들어 주세요."
"... 키스해도 되나?"
"......"
아이끼리, 미숙한 자들끼리 알아가면 되겠지. 라고 결론을 내며 사유라는 행복감에 젖어든 제안을 건넨다. 그에 보기 드문 반응을 보이는 보로스에 그녀는 언제나와 반대같다는 감상을 내린다. 그래서일까, 언제나보다 대담하고도 긍정적으로 부탁하는 그녀다. 언제나 기다림을 준, 당겨지던 것만 같던 여성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들려온 남성의 말에 놀란다.
데쟈뷰. 분명 기차에서 있던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는 듯한 상황. 그때는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거부했던 질문이자 애원.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는 상황. 여행을 왔고도 둘만이 있는 현재, 거기다 분명 자신들이 있는 곳은 예약한 여관일 터다. 그렇다면 기차에서 했던 말대로 그는 행해도 문제없다.
"여긴 이미 여관이에요."
"아아, 그랬지. 이미 여관이었지."
직접적 허락은 왠지 부끄러웠던 걸까. 사유라는 빙둘러 얘기한다. 분명 그도 기억하고 있을 기차 안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며 간접적 허락을 내린다. 자신에게 맞춰준 걸까, 보로스도 빙둘러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는 걸음은 직선적이고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이 세걸음 물러났던 거리를 단 한 걸음으로 다가온 연인을 올려다 보는 사유라. 곧 자신에게로 그 큰 키에 걸맞게 깊이 숙여지는 상체와 뻗어 온 손을 얌전히 기다린다. 가까워지는 얼굴의 거리에 절로 눈을 감아 다가올 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녀에게 닿은 감각은 오감 중의 촉각이 아닌 청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