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누군가의 한숨소리가 허공에 퍼진다. 아니, 그건 한숨이 아니었다. 기분이 좋음에 나온 일종에 감탄의 표현이었으며, 목소리의 주인은 연인과 여행을 온 사유라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풀어진 표정을 짓고 있다. 본인도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가지고 있는, 일상이기에 미미하더라도 가지게 되는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감각에 어깨서부터 허리까지의 힘을 뺀다. 그로인해 절로 상체가 뒤로 기울어짐에도 개의치 않는 그녀의 등을 무언가가 받쳐준다. 등에 닿는 무언가에 놀라기는커녕 제 머리를 편히 기대기까지는 여성의 귓가에 목소리가 내려온다.
"네가 온천을 이만큼 마음에 들어할 줄은 몰랐군."
"저도 이렇게 마음에 들 줄은 몰랐어요."
착각인지 평소보다 희미하게 촉촉한 듯한 연인의 말에 사유라는 미소 대신 목소리에 웃음기를 담은 채 답한다. 그것도 좋은지 수건으로 감아올린 머리에 부비는 보로스에 결국 풀어져 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올리게 된다. 지금 자신이 연인의 품안에서 온천을 즐기고 있는 상황이 뭔가 신기한 그녀다. 더불어 아까 전에 먹었던 호화로운 저녁을 떠올린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만큼 호화로운 식사는 처음이었다.
"아까 너무 먹었나 봐요. 아직도 배가 부르네요."
"확실히 평소보다 많이 먹기는 했지. 나는 그게 좋았다만."
"그래도 결국 남은 게 많았잖아요. 보로스가 전부 먹어주신 건 고마운데 괜찮나요?"
"괜찮다. 그 정도 양은 거뜬하니까. 마음만 먹으면 소화도 금방이기도 하고. 그리고 네가 남기는 건 아깝다고 하지 않았나."
"... 뭐, 그랬죠. 그렇다고 정말 다 먹을 줄은 몰랐어요."
옷 대신 커다란 타올로 감싸여진 배를 문지르며 아까의 맛있었던 음식을 떠올리는 사유라. 처음 보는 음식이나 맛있음에 평소보다 많이 먹어버린 자신에 대해 아직도 좀 더 살이 붙었으면 하던 그가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불어 자신의 걱정 어린 물음에 의기양양하면서도 다정한 답변에 커다란 밥상 위에 있던 호화로운 만큼 남달랐던 양의 음식들을 떠올리는데... 분명 2명만이 왔던 자신들에게 적게 잡아도 8인분의 음식이 차려졌었다. 여관주인께서 감사함에 최고의 저녁을 챙겨준 사실은 고마웠으나 서민적 감상으로는 남으면 너무도 아깝고도 좋은 음식재료들의 낭비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헌데 그걸 자신이 먹은걸 빼도 7인분의 음식을 모두 먹어준 그. 들어오기 전과 자신에 허리쯤에 닿는 연인의 배는 언제나와 전혀 변함이 없음에 새삼 그의 체질이 신기하면서도 고맙기도 했다.
이런 저런 혼자만의 생각을 하는데 바람이 불어왔다. 그에 드러난 어깨와 얼굴이 추워 반사적으로 부르르 떨게 된다. 생각해보니 그냥 자신들이 지금 있는 곳이 노천온천이니 바람은 당연한 것이다. 누군가가 온천에 담근 몸은 따스하고 위는 서늘하거나 추운 것이 노천온천에 특징이라고는 했지만, 이 부분은 조금 미묘한 사유라다. 목까지 물에 담글까하고 고민하던 찰나 두꺼운 팔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왔고, 곧 그게 걱정 많고도 자상한 연인의 팔임을 알게 된다.
"추우면 돌아갈까."
"이거면 충분해요. 거기다 몸 담그기까지 조금 고생했는데 금방 나가기엔 아깝잖아요."
"네가 뜨거운 물에 약한 걸 고려하지 못한 온천 쪽이 잘못이다."
"음 그건 아닐 거예요. "
자상한 물음에 답하는 자신에게 이번에는 어딘지 이기적인 의견이 들려옴에 사유라는 기쁨과 곤란함이 교차하는 미소를 지어낸다. 비록 온천에 전신을 담그기 위해 온천물에 익숙해지기까지 10분은 걸렸다지만 그렇다고 온천의 관계자들에게 따지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이 대다수의 사람보다 뜨거운 걸 참지 못하는 것뿐이기에.
그러한 생각을 하며, 온천의 따스함과 보로스의 따스함을 만끽하는 그녀다. 혼자였다면 이렇게 평온하고도 행복한 여행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정답은 NO. 애초에 혼자라면, 아직도 혼자였다면 자신은 분명 이러한 여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게 공짜라 하더라도 말이다. 만약 보로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지금쯤 어땠을 지에 대해 상상이 되었으나 사유라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대신 눈을 감아 더욱 깊이 그에게 기댈 뿐이다.
"사유라, 역시 피곤하면 잠자리에..."
"괜찮아요. 아직 좀 더 이렇게 있고 싶어요."
피곤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걸 알아차린 연인의 걱정 어린 말에 사유라는 언제나 보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한다. 어리광이라면 어리광이라고 해도 좋았다. 풀어진 몸 때문일까, 마음 또한 풀어진 듯한 느낌에도 그녀는 저항감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역시 아깝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와 모처럼 여행을 왔는데 일찍 자기엔 너무도 아깝다고 솔직하게 욕심을 부린다.
여행을 오면 싸우거나 더 솔직해진다고 하더니 자신은 후자 쪽이구나. 좋은 일인 걸까. 라며 소소한 걱정이자 궁금해 하던 사유라. 그런데 왠지 보로스가 조용하여 슬쩍 눈을 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연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데 거기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모습의 그가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는지 몰라 바라보자, 시선을 알아차린 것인지 다른 곳을 보던 푸른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돌려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순식간에 푸른 눈동자가 자신으로 가득 차는 모습은 이제는 익숙해졌어도 신기하다는 감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보로스 왜 그러고 계세요."
"네가 너무 귀여워서 덮칠 것만 같아서다."
"......"
질문에 대한 답변에 사유라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묻는다.
'이제 와서요?'
물론 그가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하는 횟수보다 더욱 많은 순간들을 참아주고, 아껴줬다는 사실을 사유라는 알고 있다. 허나 이 순간 그가 참아낼 타이밍인가에 대해서 따지자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부끄러움이 하나도 느끼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분명 입 밖으로 꺼낸다면 부끄러울 것이며, 시선을 피해버릴 자신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오늘 아직 한 번도 하지 못한 행위가 떠오르고도 하고 싶은 그녀다. 또 예전 자신과 달라진 스스로 변화에 칭찬과 자그마한 조롱을 날리며 사유라는 입을 연다. 목소리를 내기도 전 부터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하며 말이다.
"새삼 참을 필요 없잖아요. 거기다 저도.. 아까 저녁 전에 못한 키스를 하고 싶어요."
"......"
점점 목소리가 작아짐을 자각하면서도 사유라는 끝까지 전부 말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린 사실에 웃음이 나왔지만, 부끄러움에 압도되어 웃을 수 없었다. 온천에 의한 게 아닌 감정으로 인한 더위가 올라오는 감각을 느끼며 조심히 다시 연인을 바라보는 연갈색의 눈동자. 거기엔 저녁밥으로 방해되기 전의 욕망어린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온천의 수증기 덕분인지 그 시선이 묘하게 농염했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방해에도 절대로 멈추지 않을 애탐이 노골적으로, 직접적으로 전해져 왔다.
커다란 손이 턱을 잡아왔다. 오늘로 두 번째로 잡힌 턱을 따라 고개를 더욱 올린다. 자신에게로 내려오는 그의 고개에 이어 이마에 입맞춤이 내린다. 다음은 오른쪽 눈의 눈꺼풀, 다음은 왼쪽 눈의 눈꺼풀, 다음으로는 콧등, 다음은 오른쪽 볼의 순서로 느릿하고도 짙은 입맞춤이 내려진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구나 라는 문장이 떠오를 때 보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유라, 키스해주길 바란다만."
"덮칠 것만 같다면서요?"
"오늘의 첫 키스는 왠지 너에게서 받고 싶어졌다. 그러니 내게 키스를..."
뜬금없는 부탁. 그래서 일까, 아니면 부끄러움에 의한 반동일까 사유라는 저도 모르게 조금은 짓궂게 질문을 건넨다. 허나 보로스는 부끄러움 하나 없이 진지하고도 애타게 부탁해왔다. 언제나 이렇다. 보로스란 존재는 부탁에 따른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는다. 매번 이러한 부탁에 그는 당당하거나 진지하거나 가슴이 떨릴 정도로 애타고도 간절하다. 그는 매번 사유라가 부정할 수 없도록 사랑을 주며, 갈구한다. 그렇기에 결국 사유라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이번처럼...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둘러 안는다. 바로 키스하기엔 부끄러워 우선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허리를 둘러 안는 연인의 팔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사유라는 마음의 준비를 한다. 키스를 하면 분명 이어질 행위는 처음이 아니더라도 낯선 장소에서 하게 될 상상을 하니 긴장이 되어왔다. 그런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는 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달남에 의한 부름이란 걸 알기에 귀엽다는 감상이 생긴다. 허나 귀엽다고만 하기엔 그 목소리가 너무도 낮으면서도 매혹적이라 치사하다고도 생각하게 된다. 잠과도 비슷한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말이다. 열기가 더욱 올라오는 감각에 사유라는 눈을 감는다. 눈을 뜨면 그에게 키스하자라고 결심한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정말 괜찮은 거냐. 무리해서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지 않나."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자신을 한 없이 걱정하는 보로스에 답하며 사유라는 미소를 짓는다. 허나 속은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온천에서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이라면 자신이 온천의 뜨거움에 결국 쓰러졌다 라는 일은 일어났었다. 그대로 다음날까지 푹 자버린 자신과 그런 자신을 걱정하며 밤을 샌 보로스에 사유라는 어딘가에 잠시 숨고만 싶은 심정이다.
난생 처음으로 목욕 도중 쓰러진 일에 정말로 자신의 체력이나 관리도, 자각도 소홀하다는 점을 뼈가 아프게 알게 된다. 실망을 했을 법한데도 자신의 몸을 걱정하는 보로스에 사유라는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댄다. 참고로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이다. 본의 아니게 어제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는 생각을 할쯤 시선을 느낀 그녀는 시선을 올린다. 아직도 걱정 가득한 연인이 보여 오자 살풋 미소를 지어낸다.
"집에 가면 푹 쉬자. 역시 온천도 하루 쉬고 갔어야 했다."
"이번에는 반론할 수 없네요. 저도 거기서 쓰러질 줄은 몰랐으니... 모처럼 여행이었는데 기차 시간 맞춘다고 서둘러 나오느라 제대로 구경도 못했네요. 죄송해요."
"괜찮다. 다음에 다시 가도 좋으니. 난 네가 무사하면, 곁에 있다면 어디든지 좋다."
어제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이번에는 그를 안심시킬 수 없었다. 자신의 한심함으로 인해 망쳐진 모처럼의 여행에 보로스에게 한없이 미안해진다. 사실 그가 이 여행을 꽤 기대하고 있던 걸 잘 알고 있던 사유라였다. 분명 아쉬울 터인데도 걱정해주는, 기쁘게 해주는 말을 속삭여주는 연인에 그녀는 기대었던 고개를 뗀다.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아쉬움과 걱정이 교차하는 시선을 주는 사랑스러운 존재의 목에 팔을 뻗어 두른다. 그리고는... 쪽하고 짧은 입맞춤을 한다. 순식간에 끝난 입맞춤이 끝나고 사유라는 보로스를 살피는데.
"한 번 더."
"안돼요. 여긴 기차 안이에요."
"이미 했으니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나."
"이번만이에요. 더 이상은 안돼요."
"사유라."
"안돼요."
너무도 그 다운 부탁이자 어리광이 들려왔다. 그에 사유라는 딱 잘라 거절한다. 다시 대형견으로 돌아온 그에도 먼저 규칙을 깬 당사자는 완고하게 안된다고 할 뿐이다. 그러자 풀이 죽는 연인을 그녀는 잠시 말없이 바라본다. 역시 그 말밖에 없겠다 란 마음 속 중얼거림을 읊은 뒤, 입을 연다. 또 어제와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 다시 재현될 모습에 미소를 만들어내며 말이다.
"그럼 집에서 하면 되잖아요."
비록 둘만의 첫 온천여행은 어이없게 끝났더라도 둘이서 함께라면 분명 즐거울 거란 사실을 이제는 잘 아는 사유라는 보게 된다. 기대에 차서 미소 짓는 연인의 모습을. 그 미소에 안도하며 다시 듬직한 팔에 머리를 기댄다. 기차의 미미한 덜컹거림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집에 돌아가면 어쩌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나 그건 그때 생각하자며 사유라는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