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 기간이라는 명목하에 주어진 며칠 간의 휴식 동안, 라페가 한 일이라고는 일찍이 불려 나간 베른하르트 대신 개를 산책시키거나, 같이 쉬고 있는 프리드리히와 몇몇 게임을 플레이하거나, 고양이 두 마리와 노는 것뿐이었다. 이래도 괜찮은가, 싶은 나날을 며칠. 드디어 본사로부터 출근 요청이 있었다. 입국 후 무려 일주일만이었다.
“아쉽다~. 더 쉬고 싶었는데.”
“그러다 영영 쉬시려구.”
프리드리히는 라페의 딴지에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그래도 좋지. 불러주는 곳은 많으니까. 단순한 농담이겠지만, 라페로서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꼬우면 해고하던가. 실제로도 그다지 다른 의미가 아닌지 조수석에 앉은 라페를 흘긋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직해도 네겐 피해 없도록 할 테니까, 걱정하진 말고. 라페는 그다지 걱정한 건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 어색하게 웃어넘기고 말았다. 저 말도 분명 농담이겠지.
“긴장한 신입사원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긴장했으니 하는 말이지. 때려치우고 싶으면 말하라고. 같이 이직해줄 테니까.”
“거참…. 애사심 없는 발언이시네요.”
“애사심보다는 장기적인 이득을 봐야 하지. 애사심, 애사심 요구하는 기업치고 제정신인 기업은 없다고. 명심해둬.”
죄다 적게 주고 미치도록 굴리지. 프리드리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뭐, 우리쯤 되면 어느 기업이라도 보통 잘해주지만.”
“두 분이야 경력도 있으시고 학력도 있으시니까요.”
“너도 포함이야.”
“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라페가 진심으로 물었다. 저는 왜요? 지나친 진심에 프리드리히는 두 번째로 웃음보를 터뜨렸다. 첫 번이 평소보다 조금 큰 웃음이라면 이번은 폭소였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싶을 수준이었으므로, 라페는 “앞, 앞이요!”하고 소리를 높여야 했다.
“이, 이거, 당사자가 되니까 되게 웃기네. 당할 때는 열 받는다만.”
프리드리히는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숨은 불안할 정도로 떨렸다.
“그 경력도 학력도 있는 센티넬의 가이드잖아.”
“전속도 아닌데요.”
“뭐? 전속이야! 아니, 잠깐….”
운전석에서 끄응, 앓는 소리가 났다. 프리드리히는 자못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에서 우리랑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할 때 뭐라고 했어?”
“그냥 동료라고 하셨는데.”
“업계용어군…. 우리는 같이 일하는 사람을 팀원이라고 부르지, 동료라고 부르진 않아. 아, 네가 잘못한 건 아냐. 업계 사람도 아니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후우. 짙은 한숨소리가 라페의 고막을 때렸다. 돌아본 운전석에는 한참 웃던 프리드리히는 온대간대 없고, 잔뜩 짜증난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우리가 괜히 너를 기다린 게 아냐. 안정된 가이딩도 물론 한몫했지만, 우리랑 파장이 잘 맞아. 너를 대체할 인력이 없다는 소리다.”
“아.”
“가이딩이 안정됐으니까, 한국 쪽에서도 좀 탐냈던 모양이라…. 꽤 고생했다던가.”
“그건 담당자님께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가이딩이 괜찮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구나. 프리드리히는 라페의 얼빠진 소리에 바람 빠진 소리로 화답했다.
“가이딩 안정도로 따지면, 이쪽에도 비슷한 수준인 가이드가 있어. 굳이 비행기로 12시간 걸리는 아시아에서 스카우트 할 필요도 없이. 네 가이딩 안정도는 높은 편이되, 눈에 띌 만큼 아주 빼어나게 높은 편은 아니야.”
“적당한 수재라는 느낌?”
“그래. 안정도보다도 더 희귀한 특이점이 있으니 헤드헌터가 간 거다.”
떠드는 와중에도 차는 열심히 도로를 달렸다. 신호에 걸리고, 기다렸다가, 좌회전. 먼 거리에서도 보이던 건물이 지근거리에서 보이니 제법 박력있었다. 통유리로 된, 거대한 건물. 통칭 레지먼트.
“우리랑 파장이 유사하다는 특이점이 말이야.”
두 사람이 탄 승용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레지먼트의 지하로 향했다.
“에이전트 전원이 센티넬인 경호 회사에 어서 와.”
우선 네 담당자부터 만나자고. 신입한테 아무것도 말 안 해주는 담당자가 어딨어? 라페는 프리드리히의 이 가는 소리를 듣고 담당자에게 애도를 표했다.